▲ 박경리 생가

원주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부터 강원도 내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강원도란 명칭도 조선 초기, 태조 4년(1395)에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강원 감영이 있던 곳이다. 현재 원주시내에는 감영이 축소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지만 당시의 번성을 가늠할 수 있다. 무엇보다 ‘토지’의 저자로 알려진 박경리 문학공원이 볼거리다. 그외에 한지 박물관, 원주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원주시내 유적들 살펴보기
원주 시내에 눈에 띄는 유적지가 있다. 바로 강원감영(사적 제439호)이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 태조 4년때 설치돼 고종 32년(1895)년까지 이어졌다. 약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 업무를 수행하던 유서 깊은 곳. 그곳엔 무엇이 남아있고,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무엇을 알게 해줄까?

일단 정문 포정루를 지나 감영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끼고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의 건물을 만나게 된다. 원래는 정청인 선화당을 비롯해 재은당(내아), 4대문, 객사 및 부속건물 등 31동의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원주시 청사, 재향군인회관 등이 생기면서 규모가 많이 축소됐다.

사실 감영자리가 옛 모습대로 남아 있는 곳은 드물다. 그대로 방치돼 있다가 2000년 발굴조사를 했다. 중삼문터, 내삼문터, 공방고, 책방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포정루에서 중삼문터와 내삼문터를 거쳐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터, 행각터 등을 발굴했다. 또 선화당 뒤편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은 양호한 상태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감영문화제를 열고 있다. 감영문화제는 조선 초부터 열리던 동악제가 기원이 된다. 치악산에 동악단을 쌓고 조정에서 봄과 가을에 보내온 향과 축문을 바탕으로 원주와 인접한 일곱개 고을 수령들이 모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봉행한 동악제를 지냈다.

또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새로 부임해 오면 먼저 이곳 치악산동악단에서 동악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동악제를 계승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1년부터 ‘군도제’로 시작해 이후 ‘원주치악제’로 개최되다가 강원감영지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그 명칭이 ‘강원감영제’로 바뀌게 된다.

동악제에 이어 국형사가 주관한 불교식 산신대제가 성대히 이어진다. 이어 강원감영지 선화당에서 관찰사고유제가 진행된다. 

박경리 작가 인생 엿보기
원주시내에 여행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박경리문학공원이다. 도심 속에 있는 박경리 공원은 한눈에 봐도 정비가 아주 잘 돼 있다. 멋진 정원이 꾸며져 있고 우측에는 생가가, 왼쪽에는 ‘박경리 문학의 집’이 있다. 일단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다. 매 시간별로 해설시간이 정해져 있다. 필자가 이곳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는 모든 궁금증을 한치의 거침도 없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통해 궁금한 것을 정리하도록 한다.

우선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 선생이 원주와 어떻게 인연이 됐을까?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 단구동으로 이사온 것에는 작가의 외동딸(김영주)이 원주에 내려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은 김지하 시인의 부인이고 남편은 옥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시댁인 원주에 살고 있었다.

문학관에서는 작가가 살아온 인생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그녀의 아름답던 젊은 시절부터 진열조차 어려운 방대한 ‘토지’의 책까지 말이다. 토지는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해 1994년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이다. 보통의 인내력으로 상상도 못할 일이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했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됐다.

북카페에는 박경리 선생이 집필한 단편집과 시집을 비롯, 편지쓰는 방법을 기술한 ‘서한문독습(1914년)’, 조선총독부가 펴 낸 ‘일본구어법 및 문법교과서’ 등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교과서 500여점과 1900년대 초 발간된 문학서적 등 1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을 나와 생가로 나온다. 집은 생각보다 고급스럽다. 외관보다 내장은 더욱 고급스럽다. 지방신문사 지사장, 교수 등이 전에 살았단다. 잘 살려고 잘 지어놓은 집을 구입한 듯하다. 마당에는 선생과 고양이의 동상이 있고, 대문 입구에는 작은 못이 있다. 손자를 위해 손수 만든 연못이란다. 집 옆으로는 잘 가꿔놓은 텃밭이 있다. 그녀의 집필실을 본다. 살면서 토지의 4부와 5부를 집필한 유서깊은 곳. 서재에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책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많이 없앴다. 그 옆 방에 너른 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작가가 쓰던 몽블랑 만년필과 원고지가 놓여 있다. 오로지 손으로 원고지에 글자를 썼을 것이다. 평소 커피와 담배를 좋아했다는 작가. 찾아오는 사람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떨이는 없앴단다.

하지만 이 집이 살아남는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995년 택지개발지에 포함돼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됐다. 하지만 한국토지공사에서 공원부지로 결정했다는 것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1만1438㎡ 부지에 조성된 박경리문학공원은 선생의 옛집과 정원, 집필실 등을 원형대로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소설 토지의 배경을 옮겨놓은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용두레벌 등 3개의 테마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공원은 선생의 옛집과 정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토지의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3개의 테마공원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홍이동산은 뒷동산으로 정자바위가 있다. 그리고 용두레벌에는 신작로와 철길·일송정·용두레 우물·만주 들길·돌무덤과 흙무덤 등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만주의 지명을 따온 시설이 들어서 있다.

아직도 박경리 작가가 살아있는 듯한 집. 마당에 만들어진 동상 치마폭은 아주 넓다. 고향의 어머니를 만난 듯 다정스럽게 앉아 사진을 찍으라고 넓게 만든 치마폭이다. 그곳에 앉아 작가를 그려본다.

살아 생전 제자들이 다시 태어나면 글을 쓰겠느냐고 물었단다. 그녀가 답했다.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여행정보
○찾아가는 길
서울톨게이트 → 영동고속도로 → 실간분기점 원주방면 → 용인휴게소 → 여주분기점 원주방면 →중앙고속도로 → 남원주IC → 원주시(1시간30분 소요)
○별미집
자유시장 지하에 가면 맛있는 칼국수, 순대국 등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생과일주스는 아주 저렴하다. 그 외 원주시내에는 막국수 잘하는 집이 여럿 있다.
○주변 볼거리
한지 테마파크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원주가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의 주산지라고 기록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 원주시 호저(好楮)면이란 지명도 닥나무와 연관돼 있었다. 예로부터 원주는 ‘한지의 본고장’으로 불리어졌다. 특히 닥나무 밭이 많아 저전동면(楮田洞面)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한지테마파크(무실동 16, 문의:033-761-8012)가 있다. 부지 2만6279㎡에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로 한지역사실과 체험실, 카페테리아, 기획전시실, 수장고, 회의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 야외에는 공연장과 중앙광장, 산책로 등이 조성돼있다. 또 원주역사문화박물관(봉산동 836-1, 033-737-4371, www.wonjumuseum.or.kr)도 있다. 다소 움직이면 토지문화관(033-762-1382,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도 볼 수 있다. 1999년에 개관했다. 토지문화관에서는 각종 학술·문화행사를 열고 작가들에게 창작 지원도 하고 있다. 토지문화관 바로 옆에 있는 사택은 소설가 박경리가 1998년부터 2008년 5월 타계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2층집이 있어 작가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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