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본질 꿰고있는 ‘패션왕’산실
이정기 디자이너는 수년 동안 남성 수트를 전문으로 작업해왔다. 이정기 디자이너는 흔히 말하는 해외파가 아니다. 한국 패션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비아’ ‘나비’ ‘이정기 서울’이라는 자기 남성복 브랜드들을 만들어서 수년째 사업을 벌여왔다.

이정기 디자이너는 지난 17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15 S/S 서울패션위크에서 첫번째 패션쇼를 열었다. 그동안 디자인 작업을 계속해왔지만 자기만의 패션쇼를 연 건 처음이었다.

패션쇼장은 남성지 패션 에디터들과 패션 업계 관계자들, 일반 대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연예인들이나 보러 온 구경꾼들이 아니었다. 새로운 창작 재능을 구하러 다니는 순례객들이었다. 한 남성패션지 편집장은 말했다. “새로운 발견입니다. 한국 남성복 시장을 이끌 차세대 디자이너가 될 잠재력이 충분하네요.”

운이 좋다면, 이정기 디자이너는 동대문 패션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 속으로 흘러들 수도 있다. 이런 식이다. 먼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매 시즌 열리는 서울패션위크에서 새로운 신진 디자이너로 각광 받는다.

아직도 논란 거리긴 하지만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우주선 모양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랜드마크형 건물인 만큼 집객 효과만은 확실한 건물이다.

서울패션위크의 주무대로 자리매김하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곧 패션메카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패션 관계자들과 국내 관객들은 미래형 건물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래의 패션을 미리 본다.

패션전문가들 사이에서 잠재력을 인정받으면 다음은 패션업체들이 나선다. 동대문엔 두산그룹의 두타와 롯데의 피트인 같은 대형 패션몰들이 있다. 두타나 피트인은 여느 백화점들과는 다르다. 보통 백화점들은 해외 유명 브랜드들을 입점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두타와 피트인은 한국 디자이너들에 집중하고 있다. 두타는 가장 소비자들의 출입이 잦은 1층과 2층을 한국 디자이너 전문 매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피트인에도 한국 디자이너 개인 매장들이 즐비하다.

사실 한국 디자이너들은 아무래도 소비자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은 옷이 아니라 브랜드를 산다. 백화점들이 해외 명품 브랜드들을 모셔오느라 혈안이 돼 있는 이유다. 두타나 피트인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과거의 경험 탓이다. 한때 동대문 일대는 이른바 카피 패션의 대명사였다. 전세계 유명 패션 유행을 빠르고 싸게 베껴서 내놓는데는 동대문이 세계 최고였다.

동대문은 SPA 브랜드들 때문에 큰 위기에 빠졌다. 세계 패션 유행은 파리와 밀라노와 뉴욕에서 전세계로 확산된다. 아무래도 자라나 H&M 같은 해외 SPA 브랜드들이 동대문 상인들보다 더 빨리 더 싸게 더 품질 좋게 베낄 수 밖에 없었다. 동대문은 카피 패션만으론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려웠다.

동대문은 스스로 패션을 창조하기로 결심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런데 동대문은 패션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흔히 패션의 본질은 창의성이라고 여긴다. 틀렸다. 패션의 본질은 복제다.

유행이란 결국 대중이 서로의 옷차림을 흉내내는 걸 말한다. 패션 소비의 본질이 복제라면 패션 생산의 본질도 복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카피 패이스트’만 해선 안 된다. 잘나가던 동대문이 위기에 빠졌던 건 똑같이 베끼기만 해서였다.

창조란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그런 창조는 신의 영역이다. 인간의 창조는 신의 피조물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 변형하는 정도다. 재창조다. 패션 디자인에서의 창조도 똑같다. 전세계의 유행과 한국의 유행, 아시아의 유행을 우선 복제한다. 이때 끊임없이 복제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변형이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변형은 한사람의 창작자가 일으키는 게 아니다. 그만한 혁신적 변형은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들의 영역이다. 작은 변형들이 수없이 파도처럼 일어나게 하려면 복제와 변형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구 서로를 복제하고 그걸 자기 취향대로 조금씩 고치는 일들이 무한히 일어나는 공간 말이다. 지금의 동대문처럼 말이다. 동대문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유행의 복제와 변형의 재창조 과정이 쉴새없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동대문은 제조 기반까지 갖추고 있다. 시안 디자인이 나오면 인근의 신당동과 사근동, 장위동과 후암동 공장에서 샘플 제품이 나오는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런 동대문 상권의 신속성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화제성과 서울패션위크의 창조성, 두타와 피트인의 한국 디자이너 매장의 재창조성이 결합된 게 동대문 패션 생태계다.

사실 파리나 밀라노의 패션 생태계란 것도 별 것 아니다. 결국 동대문과 같은 구조다. 다만 오랜 역사성 덕분에 세계적 명성을 얻었을 뿐이다.

게다가 동대문엔 ‘요우커’라고 하는 거대한 중국인 관광객 시장이 있다. 한정된 한국 내수 시장 뿐만 아니라 인근 중국 시장이라는 배후 시장까지 갖추고 있단 얘기다. 동대문은 복제와 변형의 창조 생태계에 거대한 유통 소비 시장까지 갖췄다.

 동대문 패션 생태계가 파리나 밀라노만큼 성장할지는 알 수 없다. 동대문 생태계의 잠재력이 파리나 밀라노 못지 않은 건 사실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데뷔한 이정기 디자이너가 파리 콜렉션 무대에 서는 게 더 이상 꿈이 아니다.

- 글 : 신기주(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사라진 실패」의 저자)
-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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