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쏟아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야심한 밤 운전이 쉽지 않다. 옛 생각을 더듬어 한적한 해미읍성 앞에 있는 모텔에서 하룻밤을 유한다. 한때 당진 근처에서 6개월 정도를 유하던 때가 있었다. 손만 뻗치면 사과를 딸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반농반어를 하는 마을 이었다. 당시 주변을 샅샅이 뒤져 여행을 했었다. 그 이후로도 개심사와 해미읍성 정도는 들렀지만 마애삼존불과 용현계곡을 찾은 지는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다.

이른 아침, 다행이 비는 그쳤다. 관광객 하나 없는 해미읍성에 발을 내딛는다. 초록빛과 들풀로 물든 넓은 성터.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나무에도 푸른 잎이 우거져 있다. 해미읍성은 1491년 성종 때 완성된 석성인데 500년 풍파를 견디고도 성곽과 문루가 현재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 보존이 전국에 있는 성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른 아침 산책을 나온 아주머니 외에는 썰렁하다. 이내 차를 돌려 개심사로 향한다. 개심사를 굳이 들를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잠시 절집을 찾아도 좋을 듯하다.
개심사 들어가는 길에 운 좋게 서산목장에 풀을 뜯고 있는 소떼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여러번 왔던 곳이지만 한번도 방목된 소를 본적이 없었다. 소떼와 백로가 한데 어우러져 아침밥을 먹기에 여념이 없다. 개심사(서산시 운산면 신창리)는 상왕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작지만 아담한 사찰이다. 울창한 홍송으로 뒤덮히고 초록빛으로 물든 울창한 숲에서 풍겨내는 청신한 기운이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열어주는 듯하다. 개심사가 좋은 점은 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허대사가 머물렀다는 요사채 뒤로 난 산신각에 눈도장을 찍고 이내 서산 마애불로 향한다.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을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용현계곡. 계곡 자체만으로는 큰 점수를 줄 수 없지만 바다가 인접해 있는 이 지역을 감안한다면 감로수와 같은 존재다. 용현계곡은 가야산 석문봉에 깃대를 올리고 하나는 옥양봉과 수정봉으로 달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상왕산으로 갈라진 틈바구니에 계류가 흘러 생긴 골짜기로 무려 4km에 이른다. 비가 내린 탓에 계곡물 수량이 많이 불어났다. 이어 마애삼존불을 향해 가벼운 트레킹을 한다.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에도 숲이 우거져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백제의 미소’라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가운데 부처님은 둥근얼굴에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두툼한 입술로 벙글벙글 웃고 있다. 누구나 보아도 불상의 미소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미소가 편안하다. 이곳은 태안 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지름길 위에 있는데, 길은 옛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옛길이었다. 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600년 당시에는 중국 불교 문화에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이곳을 벗어나 계곡길을 따라 올라간다. 보원사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약 1km의 거리에 보원사지(사적 제 316호)가 있다. 육안으로는 특별히 변한 것이 없다. 단지 예전에는 보원사지에서 길이 끝났다는 것만 기억된다. 무성이 풀숲이 되어 버린 절터. 이곳은 고려초에 창건한 사찰로서 고승 법인국사가 수도했다 한다. 보원사지내에 적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103호), 5층석탑(보물 104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106) 등이 있다. 보원사지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던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 석탑상, 하대 기단의 이완이 심하고 탑신이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석탑보존을 위해 보수공사를 시행하게 됐다.
돌아나오는 길에 미륵석장승에 차를 댄다. 장승이라고 하기보다는 마애불 같다. 사람 키를 넘는 돌무지 위에 서 있다. 주변은 그대로인데 변한 것은 필자일 뿐이었다. 세월은 인간을 변하게 할 뿐이다.
■자가운전 : 운산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해미 쪽으로 1.5km 가다 보면 길 왼쪽에 오일뱅크 가야주유소가 있고 주유소 앞에 덕산으로 가는 618번 지방도로가 있다(서산마애불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4.2km 가면 다리를 건너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가는 도중 터널도 통과하고 왼쪽에 고풍저수지도 보인다) 오른쪽 길을 따라 700m 가면 작은 가게와 함께 마애삼존불로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별미집·숙박 : 원래 이곳은 어죽이 유명했다. 어죽을 판다는 식당은 이른 아침에는 식사가 불가능하다. 그 외 몇 개의 토속음식점이 있다. 멀지 않은 덕산온천관광단지나 수덕사 근처를 이용하면 좋다. 숙박은 민박집이나 덕산관광호텔 등을 이용하거나 고암 이응로 생가인 수덕여관을 이용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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