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탓이 아니다. 지난 11월 19일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을 무산시킨 건 분명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 국민연금 탓이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이 합병을 결의한 건 지난 9월 1일이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합병을 통해 2020년까지 매출액 40조원의 초대형 종합플랜트 회사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12월 1일까지 모든 합병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주식매수청구권이었다. 주식매수청구권이란 합병을 반대하는 주주가 자신의 주식을 회사가 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가 기준을 각각 2만7000원과 6만5439원으로 결정했다. 주식매수청구권 신청 마감일인 지난 11월 17일 두 회사의 주가가 각각 기준 주가보다 낮으면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주식을 사들여야 한다. 두 회사는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경우를 대비해 각각 9500억 원과 4100억 원씩 매입 자금을 마련해놓았다.

합병 이후에도 회사의 주식이 기존 주가보다 오른다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이유가 없다. 주식을 들고 있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이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시너지를 낙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박대영 삼성중공업 대표와 박중흠 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여러 차례 설명회를 열고 주주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법인명은 삼성조선해양으로 결정했다.

별무소용이었다. 우선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높은 부채 비율이 문제였다. 지난 2분기 말을 기준으로 삼성중공업의 부채 비율은 225%였다. 삼성엔지니어링은 531%였다. 합병 삼성조선해양의 부채비율도 270%에 달했다. 단기적으로 재무안정성이 악화될 건 명약관화했다. 중장기적 전망도 선명하지가 않았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각각 해양플랜트와 육상플랜트에 강점이 있다.

삼성조선해양은 이걸 발판으로 육해상을 아우르는 종합 EPC 업체가 되겠다고 밝혔다. EPC란 설계와 구매와 제작을 한꺼번에 하는 중후장대 산업의 끝판왕이다. 그림은 좋았다. 정작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모두 설계 능력이 취약했다. 물론 이건 한국 조선플랜트 업계의 고질적 약점이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이 합병한다고 해서 삼성조선해양에 갑자기 설계 경쟁력이 생기진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육상 플랜트와 해상 플랜트의 부품을 공유하는 부분도 기대만큼 교집합이 크지 않았다.

재무적 혼합이고 인적 결합일 뿐이었다. 수년째 조선플랜트 업황은 최악이다. 삼성중공업은 무리하게 공사를 수주한 탓에 실적이 악화돼왔다. 삼성엔지니어링 역시 사정이 별 다르지 않았다. 결국 합병 카드를 통해 부채 비율을 낮추고 경비를 절감하겠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합병 과정에서 크고 작은 구조조정이 잇따를 거란 소문이 돌았다. 큰 그림은 보기 좋았지만 살펴볼수록 내실이 부족한 합병이었다. 뚜렷한 합병 시너지는 없고 미시적 재무재표 개선 효과만 있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은 2013년 연말부터 이어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일환으로 보였다. 삼성그룹은 지난해말부터 사업구조 개편을 통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계속해왔다. 최종 목표는 복잡한 순환출자고리를 끊어내는 데 있었다. 굵직한 합병 작업이 줄을 이었다. 패션 부문을 떼어낸 제일모직을 삼성SDI에 흡수통합시켰다. 삼성종합화학은 삼성석유화학과 합병했다. 삼성에버랜드는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바꿨다. 삼성의 뿌리는 누가 뭐래도 제일모직이다. 지난 11월 14일엔 말 많았던 삼성SDS가 마침내 상장됐다. 일사천리였다. 덕분에 2013년말까지만 해도 30개에 달했던 순환 출자 고리는 14개 안팎으로 줄었다.

정작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은 조금 궤와 결이 달랐다. 앞선 합병은 그룹 지배구조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었다.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시세보다 비싸게 주식을 매매할 수도 있었다. 일종의 경영권 프리미엄인 셈이었다. 각 합병의 개별 시너지 역시 선명했다. 제일모직의 화학 부문이 삼성SDI로 합병되는 건 사실상 시간 문제였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은 지배구조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보유하고 있는 삼성 계열사 지분도 거의 없었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일종의 끼워팔기였다. 일련의 사업구조개편 작업 과정에서 슬쩍 부실 회사 합병 작업도 함께 진행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장 반응은 싸늘하게 식었다. 지난 17일 삼성중공업의 주가는 2만5750원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은 6만800원이었다. 결국 주가 부양에 실패했다. 두 회사의 지분을 각각 5%씩 들고 있는 국민연금은 당연히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을 따라서 다른 기관 투자자들과 개인 투자자들도 차례로 주식매수청구권을 신청했다.

애당초 시너지가 불투명한 합병을 무리하게 시도한 탓이었다. 마이너스 더하기 마이너스는 마이너스다. 더하기를 곱하기로 바꿔달아서 시너지를 강조하고 슬쩍 가로치기로 따로 계산하게 해봐야 결국 답은 마이너스다. 그걸 곱하기로 포장하고 가로치기로 숨겨보려고 했지만 시장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삼성은 가끔은 정부도 이긴다. 삼성공화국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삼성도 시장은 못 이긴다. 국민연금 탓이 아니었다.

-글 : 신기주(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사라진 실패」 의 저자)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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