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급 공화국에 사는 기분입니다. 원청 대기업이 중소업체한테 끊임없이 품질 개선을 요구하는 건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원청 업체의 이윤만을 목적으로 한 무리한 계약을 강요하니 모든 하청업체들은 매번 자신의 고혈을 쥐어 짜내며 맞추고 있습니다. 공장은 돌리고 봐야 하잖아요.” 경기도에서 금속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의 A대표는 하소연했다.

그는 얼마 전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참다못해 부품 납품을 포기해 버렸다. A대표는 “생산단가 공개를 대놓고 요구하더니 거기에 기술 자료를 명시해줄 것을 강요했다”며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면 거래를 끊겠다며 은근히 압박을 해 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사실 한국경제는 탄탄한 피라미드 형태의 하도급 경제 구조로 이뤄졌다. 대기업이 내수와 수출을 주도하며 완제품을 내다팔면 수많은 협력 중소업체들이 부품을 공급해오며 성장했단 얘기다. 1970년대 초반 중공업을 육성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도 한국경제는 제조업, 건설업, 서비스업종 등 전 분야를 막론하고 이러한 피라미드식 하도급 방식으로 가동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하도급 경제 구조의 하방으로 내려 갈수록 중소업체들의 생존 여건이 척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도급 대금 지연지급 △현금결제 비율 미준수 △단가 후려치기 △기술인력 빼가기 등 원청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제조업체의 B대표는 말한다. “삼성전자, 현대차가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물론 자체적인 연구개발(R&D)과 투자가 선행됐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기간에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하도급 업체를 마구 닦달했다는 겁니다. 이제라도 중소업체가 살아야 대기업도 성장한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납품대금 깎고 기술자료 뺏고 
여전히 부당한 하도급대금 결정·감액 관행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회장 김기문)가 대기업 협력 중소제조업체 300개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원사업자의 부당한 방법으로 인해 일반적인 지급 대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수준으로 하도급 대금(단가)이 결정된 경험이 있는 업체가 전체의 8%로 조사됐다.

하도급 대금 감액(단가인하)을 경험한 업체는 10.3%에 달했다. 이 가운데 6%는 별 다른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 부당하게 감액을 요구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기술자료 요구, 지연이자·어음할인료 미지급 등도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렇다면 중소 제조업체들은 납품단가의 적정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응답기업의 46%가 ‘적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는 ‘원자재 가격상승분이 부분반영 됐으나 가격인상이 충분치 않음(36.2%)’을 우선 꼽았다. 이어 ‘치열한 가격경쟁으로 납품단가 인하 불가피(31.9%)’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불만이 산적해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에게 뾰족한 대응을 못하는 실정이다.

조사결과 불공정 하도급거래 행위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경우 해결방안으로 ‘원사업자와 자율 협의를 통한 해결’이 88.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는 하도급 구조의 특성을 잘 말해주는 부분이다. 불공정 하도급거래라도 원청 대기업과의 합의를 통해 어떻게든 해결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막상 정부기관에 민원이나 분쟁조정 신청은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섬유 가공업체의 C대표는 “신고를 해도 일회성으로 대기업이 적은 벌금을 무는 것에 그친다”며 “그 뒤에는 해당 협력 업체와의 거래를 끊기 때문에 이래저래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강조했다.
 

中企불공정하도급 신고센터 ‘묘약’
이렇게 대기업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기피하는 중소기업의 애로를 완화하기 위해 중기중앙회가 지난달 문을 연 ‘불공정 하도급 신고센터’는 하도급 중소업체가 눈여겨볼 만한 기구다. 우선 협동조합 회원사들의 신고내용을 바탕으로 신고센터가 직접 공정위에 불공정행위를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신고인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본부에서 직권조사 방식으로 처리한다.

이번에 신고센터를 설치하는 사업자단체는 프라스틱연합회, 금형조합 등 17개 사업자단체다. 업종별로는 금형, 단조, 철근, 조선해양기자재, 프라스틱, 전기, 전선, 피복, 박스, 전시장치, 정보산업, 레미콘 등이다. 중기중앙회, 대한전문건설협회 등 기존 2개 신고센터는 분쟁조정 업무 이외에 회원사를 대신해 신고하는 방식을 추가할 계획이다.

또한 중기중앙회 신고센터의 경우, 협동조합 신고센터가 설립되지 않은 업종의 중소기업들을 대신해 신고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하도급의 구조적인 문제 가운데서도 우선 납품 대금 지급의 개선이 중요하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경북의 D업체 관계자는 말했다. “만기일에 대한 규제가 이뤄진다면, 할인 시 부담하는 수수료나 혹시나 모를 부도에 대한 부담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산의 E업체 관계자는 말했다. “발행인은 결제일까지 자금활용을 할 수 있겠지만, 수취인은 신용위험 및 비용부담이 너무 큽니다.”
 

中企 숨통 죄는 자금 불통 풀어야
이러한 하도급 현장에서 불거지는 돈의 흐름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도 지적한 바가 있다. 지난 7월14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중소 하도급 업체들이 제때 현금을 받지 못하거나 장기 어음 지급으로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각별히 챙겨야 한다”고 지시했다. 자금을 원활히 돌려 중소기업의 숨통을 열어주겠다는 뜻이었다.

특히 어음만기일 단축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많다. 중기중앙회가 지난달 중소기업 435개사를 대상으로 ‘어음만기 제한 관련 의견조사’를 실시한 결과, 중소기업의 78.4%가 ‘어음만기 규정마련(단축)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영세기업은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교섭력이 떨어져 어음을 수취하는 경우가 많다, 장기어음을 수취하게 되면 자금을 돌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게 불 보듯 뻔하다. 어음법상 어음만기에 대한 규정이 없는 점도 문제다. 전자어음의 만기는 1년인 반면에 하도급법에서의 대금지급기간은 60일내이다.
 

하도급 구조 뿌리부터 개선해야 
공정위도 하반기 들어 하도급 대금지급 관련 불공정 행위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이고 있다. 공정위는 7~8월 건설업종에 대한 현장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한 데 이어 9월부터는 10만 사업자를 대상으로 하도급거래 서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

최근에는 제조 및 용역 업종에서의 하도급 대금 지급실태에 대한 현장조사를 집중 실시하고 있다. 공정위가 이처럼 하도급 대금 지급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선 것도 하도급 대금 관련 횡포를 근절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지난해 공정위는 서면 실태조사와 올해 건설업종에 대한 1차 현장조사만으로도 1만2000개에 달하는 중소기업이 하도급 관련 대금 440억원을 지급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매서운 칼을 꺼내들기 전에 조사 계획을 미리 밝혀 원청 대기업이 자진 시정토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공정위는 하도급·가맹·유통 3개 분야의 12개 과제를 발굴, 정비한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하도급 구조 개선의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공정위의 정비내용에는 △어음대체 결제수단의 수수료 고시 폐지 △하도급법, 가맹사업법 위반 사건의 조치 3년 넘기면 담당자 징계 △중소기업 원사업자의 범위 매출액만으로 판단 등이 담겨 있다.

여기에 동반성장위원회도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 17일 열린  ‘2014년 동반성장주간’ 행사에서 대기업의 채권을 2·3차 협력사들이 결제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키로 발표했다. 대기업의 채권은 부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사실상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산업연구원도 이러한 상생결제 시스템 도입의 경제적 효과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산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2·3차 협력사는 대기업 수준의 금리 우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금융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며  2·3차 협력사의 신속한 납품대금 회수를 시사했다.  

중기청 ‘의무고발권’ 실효성 높여야
중소기업 육성을 국정과제로 내건 박근혜 정부의 핵심정책인 중소기업청 불공정거래 의무고발권이 부처 칸막이와 재계 반발에 용두사미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국회 산업통상자원위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중소기업청에서 제출받은 ‘의무고발 요청권 운영현황’을 분석한 결과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등 관련 정책이 크게 후퇴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실질적 피해구제를 위한 공정거래법 집행체계 개선을 위해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기로 한 바 있었다. 전속고발권은 중소기업청과 조달청, 감사원 등으로 확대할 예정이었다. 이는 그동안 공정위의 소극적인 전속고발권행사 때문이었다. 공정위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불공정거래가 드러난 1만2966건 가운데 1.4%인 177건만 검찰에 고발하는 데에 그쳤다.

결과적으로는 공정위의 전속고발권도 그대로 유지되고 다만 중기청이 요청할 경우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하는 의무고발권으로 완화됐다.
중기청은 이 같은 의무고발권으로 지난 9월까지 공정위로부터 60건을 통보받아 검토를 마친 21건 가운데 3건만을 고발 요청했다. 이번 불공정 행위에 걸린 곳은 성동조선해양(부당하도급대금 감액), SK C&C(위탁취소), SFA(최저입찰가 이하 하도급계약) 등이다.
중소기업계는 불공정 거래 개선을 위해서라도 중기청의 전담조직 신설 및 고발 요청권의 민간단체 확대 등을 주장한다.

지난 6월 중소기업 창조경제확산위원회(공동위원장 김기문·김광두)가 개최한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행위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는 “정부 조직 3곳에 고발권이 더 주어진 것 외에는 실효성이 없다”며 “민간이나 사회단체 등으로 고발 요청권을 확대하고, 불공정 거래 감시 전담기관도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약자 보호를 위해 불합리한 거래관행 개선하기 위해서는 고발권의 확대도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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