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생산자물가지수가 3년9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한국은행(총재 이주열)은 10월 생산자물가지수(2010년 100기준)가 104.56으로 작년 동기 대비 0.6% 하락했다고 최근 밝혔다. 이는 2011년 1월 104.3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일반적으로 생산자물가는 1, 2개월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된다. 이로써 국내 경기에 물가 하락의 압력이 작용할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물가 하락세와 소비침체 그리고 생산력 저하가 반복되는 장기침체 국면인 ‘디플레이션(deflation)’을 예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생산자물가가 3개월 연속으로 떨어진 데에는 지난 7월 이후의 국제유가 하락세 영향이 컸다. 두바이유는 전월대비 기준으로 9월에 5.2%, 10월에 10.2% 떨어졌다. 11월에도 9% 가까이 곤두박질쳤다. 세계경기의 장기침체가 원유 소비량을 감축시킨 탓이 주효했다. 여기에 미국이 셰일가스 등 원유생산량을 늘릴 것이라는 뉴스도 하락국면을 가속화 시켰다.
더 큰 문제는 중국과 일본과 유럽에서 불어오는 디플레이션 역풍이 거세진다는 것이다. 우선 중국은 제자리걸음의 경제성장률을 재고하기 위해 저가 수출품을 앞세우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본격적인 양적완화의 방침으로 국채 매입을 준비하고 있다. 경제성장률 0%대에 신음한 결과다. 유럽발 양적완화의 규모는 1000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아베 정부의 무제한 양적완화 공세도 멈출 기미가 없다.
D의 첫 계단 밟은 한국
결국엔 이러한 양적완화 동조화로 인해 우리와 같은 신흥국가에서는 물가 하락의 단초를 겪게 될 게 뻔해 보인다. 선진국들이 앞다퉈 디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디플레이션 우려에 대해 11월초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디플레이션 단계는 아니고 이를 걱정하고 방지해야하는 단계입니다.” 아직은 한국경제가 안전 단계에 있다는 긍정적 해석이다.
어쩌면 한국은 이미 D의 첫 계단을 밟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모건스탠리는 최근 연구보고서에서 경고했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 자리 잡았다. 10여개 국가에서는 생산자물가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디스인플레이션은 디플레이션의 바로 전 단계를 말한다. 장기화되면 돌이킬 수 없는 장기불황에 빠지게 된다. 수출을 통한 경기회복을 꾀하는 한국경제로써는 디플레이션의 조짐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대공황과 잃어버린 20년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국과 일본을 강타한 것은 아니다. 서서히 몰려온 디플레이션 징후를 포착하고 대비하지 못한 경제 컨트롤타워가 골든타임을 놓친 탓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생산자물가지수 하락을 단순한 경제지표 변동이 아닌 조기경보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디스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디스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통화량을 억제하고 물가상승률을 점차 낮추는 정책이다. 이게 심화되면 디플레이션에 빠진다. 국제통화기금(IMF)는 보통 2년 연속 물가가 하락하면 디플레이션으로 간주한다. 디플레이션은 물가의 하락과 함께 생산의 감소와 실업의 증가가 엎친데 덮친다. 경기의 하강국면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겪는다. 일본도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는 데에 20년이 걸렸다. 경기 블랙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