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훈(ASE코리아 본부장)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유수의 대기업 현지 직원들이 반도체 공장을 견학하러 왔다. 대부분 첨단 기술이 그렇듯이 몇시간의 견학만으로 기술 습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도체란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는 것과 현장에서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그 간극이 크다.

반도체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릴 때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첨단 제품이었지만, 반도체 제품 중 미국에서는 채산성을 맞추기 어려운 패키지(조립제품)가 도입됐다. 그 후 인건비가 싼 한국의 노동력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려는 미국 반도체 회사들이 속속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가겠다는 베트남인의 형형한 눈빛에서 우리 선배들의 결의에 찬 모습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어 학과에 상위권 학생들이 몰리고 있고 한류열풍도 여전하다고 한다. 통역을 위해 함께 찾은 대학교 졸업반 여학생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며 유창한 한국어로 감상을 말하기도 했다.

그 시작은 저렇듯 미약하지만 중국이 그랬듯이 베트남도 언젠가 우리를 추격할 것이다. 필자가 업계에 처음 발을 들일 때만해도 다소 엄살이긴 하지만 중국 최고 지도자가 자신들은 한국에 20년이나 뒤졌다며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한국에는 미래 성장 동력이 없다고 평할 정도가 됐다. 우리보다 앞서간 선진국의 공통적인 문제 외에도 우리는 저출산, 급속한 고령화라는 추가적인 어려움까지 안고 있다.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산업분야에서 기술 수준이 우리의 코앞에 다가온 중국을 저지하는 비밀병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우리나라 고객과 함께 일해 보면서 발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속도다. 실행속도에서 경쟁상대의 의표를 찌를 정도가 아니면 시장을 선점할 수 없다.

한때 말레이시아가 우리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풍부한 자원에다 신규 노동력을 뒷받침해주는 출산 수준, 영어가 공용어라 인적 인프라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으니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실제 말레이시아 갔을 때 사실상 모든 반도체 업체가 진출해 있어 전율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경제는 그 이후 고속성장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차이는 실행 속도와 신규사업에 투자하는 기업가의 결단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기업의 대소를 막론하고 가업승계를 꺼리고 기업을 매물로 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투자처가 마땅치 않고 경영환경이 예전 같지 않은 탓이 크겠지만, 기업인과 관련된 불미한 사건만 터지면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이 증폭되는 반기업 정서도 기업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욕과 야망을 꺾을 것이다.

기업가로서의 양식에 벗어나지 않는 처신도 중요하지만 경제주체로서의 자긍심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야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이 가능하다.

베트남 견학생들이 자국으로 돌아간 지 2주쯤 지나 그 여대생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인턴으로 일하던 한국계 대기업에 취업이 됐다는 말과 함께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첨단산업 분야에서 베트남 산업화의 역군으로 일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경제는 회복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유가가 계속해서 하락해 그나마 다행이지만, 유가가 다시 오르면 속수무책이 될 수 밖에 없다.

대외적인 충격에도 견딜 수 있으려면 우리의 경제규모는 더 커져야 한다. 이는 경제주체들의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아직도 배고프다.

- 글 : 김광훈(ASE코리아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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