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중호(칼럼니스트/세종대·국립목포대 초빙교수)

설은 순수 우리말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새해 첫날이라 낯이 설어 설날’이라 했다는 이야기와 ‘나이 먹기가 서러워 설날’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한편 한자로는 신일(愼日, 삼가는 날)이라 했다. 즉 한해가 시작되는 날이므로 ‘삼가(謹愼,근신)’는 날로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는 날로 여겼다. 설은 한해의 첫날이라는 뜻에서 원일(元日), 원단(元旦), 설날 아침이라는 의미로 원조(元朝) 혹은 정조(正朝)라고도 말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설맞이는 섣달그믐날부터 시작됐다.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기약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만큼 우리민족은 지혜로웠다. 지금은 잊혔지만 조선시대에는 ‘묵은세배’가 있었다. 묵은세배는 섣달그믐에 그간 돌보아주신 고마운 어르신을 찾아뵙는 인사예절이다.

한편 요즘은 망년회나 송년회를 하지만, 본시 우리에게는 모두 다 잊자는 ‘망년’이나 보내는 ‘송년’의 민속은 없었고, 섣달그믐을 수세(守歲), 제야(除夜) 혹은 제석(除夕)이라 했다. 일본은 ‘지겨운 시간이여 빨리 가라’는 송년·망년문화이나, 우리는 ‘정든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수세문화이다. 우리는 가는 세월을 붙잡고자 집안 곳곳에 등촉을 밝히고 밤을 지새우는 민속(守歲)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말하고, 그래도 잠에 취해 자면 눈썹에 밀가루를 발라 ‘희어졌다’고 놀려주었다.

서양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는 풍습이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믐날 밤에 신발을 안고 자는 민속이 있었다. 이는 야광귀(夜光鬼)라는 호기심 강한 귀신이 아이들의 신발을 밤에 신어보고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의 주인에게 병을 준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문 앞에 채나 어레미를 걸어놓았다. 호기심 많은 야광귀가 그 채의 구멍을 밤새 세다가 날이 밝으면 그냥 돌아간다고 믿었다.

또한 그믐날은 연중 진 빚을 청산하는 날이다. 빚이나 외상이 있으면 그믐날 찾아다니며 받고, 자정이 넘도록 받지 못하면 정월 보름까지는 독촉도 받지도 않는 놀라운 미풍이 있었다.

한동안 성행했던 연하장은 구한말 외국에서 전래된 풍습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세함(歲銜)의 풍습이 있었다. 윗분에게 문안인사를 갔다가 뵙지 못하면 자기 이름이 메모된 쪽지(명함)를 전달했다. 상관 집에서는 출타 시 부재 중 세배 온 사람이 명함을 두고 갈 수 있도록 상자를 마련해 놓았다.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한다. 안부인은 출타를 삼갔고 세배하러 외부에 출입하지 않았으나 양반가문에서는 계집종을 보내서 대신 문안인사를 드렸다. 이 계집종을 문안비(問安婢)라 했다.

또 새해의 복을 받는다는 뜻에서 그믐자정(설 새벽)이면 골목을 누비던 복조리장수의 목소리는 요즈음 좀체 들을 수 없고, 그믐날인 까치설도 어린이들의 동요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 한 것은 까치처럼 좋은 소식을 새해에 많이 가져오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전통적인 세시풍속에 대한 현대인들의 생각은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나날이 달라져 가고 있다. 가족관계와 의식까지도 날로 변하고 있어 종래의 민속을 실천하기도 힘든 실정이지만, 인디언의 옛 모습과 민속은 잘 알면서 막상 자신의 아름다운 고유문화와 풍속은 모른다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까?

전통 없는 문화민족은 없다.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으로 어느 나라보다 자랑스러운 세계적인 문화유산과 전래민속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내 것이 오히려 낯설고 남의 것이 더 친숙하다면 난처한 일이다. 글로벌 시대에는 내 것이 곧 힘이고 세계적인 것이 돼야 한다. 민족의 최대명절인 한해의 시작, 을미년 새아침을 맞아 잊혀져가는 고유문화의 뒤안길을 한 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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