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노믹스 등에 업고‘어게인 1980’날갯짓
지난달 22일이었다. 도쿄 신주쿠 도쿄도청사 앞 대로변은 2015 도쿄마라톤에 참가하려는 마라토너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맨 앞엔 기록 경신에 도전하는 프로 마라토너들이 도열했다. 그 뒤론 달리기를 즐기는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운집했다. 그 숫자가 무려 3만6000명에 달했다. 2007년 도쿄마라톤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마스조에 요이치 도쿄도지사가 개회 선언을 했다. 마스조에는 지난달 9일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아베 총리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됐다. 1988년에 착공돼서 1991년에 준공된 도쿄도청사는 일본 경제의 마지막 호황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도쿄도청사 앞엔 2020년 도쿄올림픽을 상징하는 사쿠라 문양의 오륜기가 내걸려 있었다.

2015 도쿄마라톤은 지금 일본이 어디를 향해서 마라톤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였다. 때마침 니케이225지수도 15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출 대기업들의 실적 호조가 주가 상승에도 호재가 됐다. 양적완화로 엔저를 유도한 아베노믹스 덕분이었다. 일본은 이대로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달린다는 계산이다. 목표 기록은 1980년대의 재현이다.

그 중심에, 아식스가 있었다. 아식스는 도쿄마라톤을 앞두고 열린 마라톤 엑스포에서 무려 1억엔 어치의 러닝 기어를 팔아치웠다. 도쿄마라톤 엑스포엔 아식스 뿐만 아니라 뉴발란스와 푸마 같은 스포츠 용품 업체들도 참여했다. 아식스가 모두를 압도했다. 단순히 아식스가 일본 브랜드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러닝화에 관해서만큼은 아식스를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 해외 브랜드는 도쿄마라톤 엑스포 입점을 아예 포기했을 정도였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아식스한테도 힘든 시간이었다. 디플레이션은 일본 내수를 침체시켰다. 만성적인 수요부족은 아식스의 실적도 멍들게 만들었다. 수출엔 엔고가 장애물이었다. 아식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러닝화 제조 기술을 갖고 있었다. 아식스의 러닝화 장인을 아디다스에서 모셔갔을 정도다. 엔고 때문에 해외 시장에선 기술적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가격 경쟁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디플레이션과 엔고는 끝내 아식스의 성장 잠재력까지 갉아먹고 말았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신규 채용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젠 많이 희미해졌다지만 일본엔 아직도 평생 고용 문화가 남아 있다. 회사 실적이 나빠졌다고 정규직을 정리한다는 건 꿈도 못 꾼다. 고용유연화가 안 되면 방법은 하나다. 신규 채용을 줄이고 비정규직화시키는 수 밖에 없다. 창업 반세기를 넘긴 아식스도 이 길을 따라 달렸다. 덕분에 아식스 임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자꾸만 높아졌다.

2000년대 이후 스포츠 브랜드들은 자꾸만 젊은 패션 브랜드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아디다스가 디자이너 신발인 스탠 스미스를 출시한 게 좋은 예다. 아식스는 그 흐름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자사의 뛰어난 기술력을 젊은 감각으로 세련되게 포장할 줄을 몰랐다.

결국 러닝화 이외의 다른 스포츠웨어 시장에선 열세에 놓이고 말았다. 1980년대 한국에선 ‘아식스맨이 스포츠맨’이라는 광고가 유행했다. 2000년대엔 ‘아식스맨도 패셔니스타’가 돼야 했다. 아식스는 여전히 ‘아식스맨이 스포츠맨’만 고집했다.

아베노믹스는 아식스가 달리는 속도와 방식을 바꾸게 만들었다. 최근들어 아식스는 글로벌 인력을 확충하는 모양새다. 2000년대 이후 사실상 정체 상태였던 아식스의 신규 채용이 부활한 셈이다. 그것도 해외 마케팅과 세일즈 인력들이다. 아식스 이외의 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다양한 인재들이 유입되고 있다. 아식스는 엔저 시대에 해외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시작은 러닝화다.

아식스는 도쿄마라톤 뿐만 아니라 뉴욕과 보스톤 같은 대형 마라톤 대회의 주요 협찬사다. 차차 전선을 다양한 스포츠웨어로 확대할 계획이다. 아식스가 다시 세계 무대에서 나이키나 아디다스와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아식스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일본 기업의 표본이다. 그들을 깨운건 엔저로 상징되는 아베노믹스다. 아식스는 침체기에도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베에 있는 아식스 스포츠과학연구소는 달리기에 관해서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역설이다. 침체기에 회사의 중견 인력들은 모노즈쿠리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았다. 장인 정신이 깃든 러닝화를 수십개 버전에 걸쳐서 꾸준히 생산했다. 덕분에 도쿄마라톤 엑스포에서처럼 주변을 압도하는 경쟁력을 갖게 됐다. 이제 엔저가 아식스의 운동화에 날개를 달아줬다. 아베노믹스 같은 정책 변수만으로 모든 기업이 승승장구할 순 없다. 준비된 기업이라면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아식스는 디플레이션 문턱에 들어선 한국 경제와 기업한테도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2015년 도쿄마라톤의 1위는 2시간6분을 기록한 앤데 쇼 네게세가 차지했다. 정작 일본 언론의 관심은 온통 전체 7위지만 일본 선수 중엔 1위로 골인한 이마이 마사토한테 쏠렸다. 이마이 마사토는 2시간7분 39초를 기록했다. 아시아 마라토너한텐 2시간7분 진입이 마의 벽이다. 일본 마라토너가 다시 그 벽을 깼다. 일본이 달리고 있다.

- 글 : 신기주(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사라진 실패」 의 저자
-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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