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됐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비넨호프’전경

열사가 순국한 현장, 정부 대신 교민 부부가 사재 털어 개관
외국 여행 중에 네덜란드인을 만나면 축구 이야기를 꺼낸다. 히딩크 감독 때문이다. 2002년 4강 신화를 이루게 했던 그날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평생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네덜란드인과 친밀함이 얹어진다. 그것뿐 아니다. 우리나라 전남 장흥과 여수, 제주도에는 하멜 기념관이 있다. ‘하멜 표류기’를 펴낸 하멜은 네덜란드인이다. 반대로 네덜란드 헤이그에는 ‘이준 평화박물관’이 있다. 다른 곳은 차치하더라도 네덜란드에 방문한 한국인이라면 이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홍등가는 찾으면서 이곳은 모르는 한국인”
네덜란드 헤이그를 두번이나 찾아야 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준 평화 박물관(Yi jun peace museum)’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를 떠나면 다시는 가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내내 울었다. 여러 자료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서 쉼 없이 목이 메어 왔다.

이준 평화 박물관 관장 인터뷰 내용 중에 “홍등가는 꼭 찾아가면서 이곳은 안 오는 한국인들”이라는 말도 명치 끝을 많이도 아프게 했다. 분명 애국자는 아니지만 해외여행 중에 만나는 한국의 흔적은 이상하리만큼 눈물을 머금게 한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그대로 배어 있는 역전을 다시 바라본다. 차이나타운 바로 못 미쳐서 작은 건물 위에 소박하게 쓰여진 ‘Yi jun peace museum’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두번째에서야 간판이 보인다. 긴 여행 끝에 만나는 입구의 한국어 간판에 또 눈물이 팽그르 맺힌다. 어떻게 이곳에 박물관이 생겼을까? 어떻게 이 멀고도 먼 곳까지 왔을까? 아직 개장 전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박물관 벨을 누른다.

만국평화회의서 평화 외친 세 열사(烈士)
교과서에만 암기식으로 배웠던 ‘헤이그 밀사 사건’ 현장에 내가 들어와 있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당시 네덜란드 수도)에 이준(1859~1907년), 이상설(1870년~1917년), 이위종(1887년~?)을 특사로 파견한다. 당시 이준 선생은 48세, 이상설은 37세, 이위종은 20살 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이들이 이곳에 왔던 이유부터 되짚어보자. 당시 고종은 친러정치를 하고 있었고 헤이그에서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을사늑약’이 일본인들의 만행에 의해 저질러진 것을 세계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험난한 행로를 되짚어보자.

같은 해 4월, 이준 열사는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도착해 이상설과 합류하고 다시 시베리아 열차(5월21일)를 타고 상트 페테르부르크(6월4일)에 도착했다. 근 2개월이나 소요되는 멀고도 먼 여정이다.

그곳에서 이범진(1852~1911년)과 그의 아들 이위종을 만난다. 젊은 이위종이 밀사 3인방에 합류된 것은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했기 때문으로 통역 겸 대변인이었다. 그곳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긴 공고사(控告詞)를 불어로 번역한 후 6월19일, 러시아를 출발해 독일 베를린에 들려 인쇄하고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리고 드용(De Jong)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는 비넨호프(Binnenhof)에서 6월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고 있었다. 참가국은 46개국이고 대표는 약 247명다. 하지만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세 특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각국 대표와 언론사를 찾아내 공고사를 웅변했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설명했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는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7월9일,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돼 연설할 기회를 얻어내 이위종은 불어로 열정적으로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울분, 분노 등의 심한 스트레스는 결국 7월14일 이준 열사를 순직하게 만든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양위식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어 한·일 신협약이 체결됐다. 그후 이범진도 자결했고 젊디 젊은 이위종의 삶도 편치 않았다. 그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교민이 설립한 단 하나뿐인 박물관
역사는 기록에만 남고 그렇게 묻혔다. 그런데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이준 평화 박물관’이 헤이그에 있다. 박물관은 특사 세명이 머물고 이준 열사가 순국한 그 호텔이다. 국가적인 차원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다. 그곳은 교민 이기항 관장과 부인 송창주씨의 열의로 이뤄낸 것이다. 이 관장은 이곳에 직장을 따라 왔다가 거주하게 됐고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2년, 드용 호텔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 것을 알게 된다. 헤이그시 당국을 설득해 철거를 막고 개인 돈을 들여 매입했다. 1995년 ‘이준 평화박물관’을 개관했다. 국가에서도 하지 않은 일을 한 개인이 만들어놓은 박물관. 이제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부부는 여러 가지 여력이 딸린다. 우리나라 역사를 되살려볼 수 있는, 유럽에서는 단 하나뿐인 박물관을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

거기에 헤이그는 볼만한 도시다. 현대와 옛것이 뒤섞여 있는 공원 도시다. 암스테르담으로 수도를 이전하기 전, 이곳은 네덜란드의 본거지였다. 특히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비넨호프는 아름답다. 3세기에 귀족 플로리스 4세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만든 성채는 여전히 눈길을 잡아 끈다. 고풍스러운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연못이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든다.

또 인접한 마우리초이스(Mauritshuis) 국립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해부도),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페르메르(터번을 쓴 소녀), 포터(황소), 루벤스, 할스 등 유명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비넨호프 주변의 바겐슈트라트(Wagenstraat)의 올드타운 역사지구를 돌아보는 재미가 좋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가 폭격 당했지만 이 골목 길에는 옛 향기가 많이 남아 있다.

■여행정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중간에 있다. 기차를 이용하면 된다. 30~40분 정도면 도착된다. 올드타운 거리에서는 쇼핑은 물론, 네덜란드 전통 음식 등을 먹을 수 있다. 그 외 많은 아틀리에, 공원, 조각품 등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서 여행하면 된다. 특히 헤이그에는 차이나 타운이 크고 넓다. 한국인의 입 맛에 맞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고흐의 그림들은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에 가장 많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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