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6년 10월, 모스크바
러시아주재 특파원 부임을 앞두고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있다.
일요일을 맞아 Arvat 거리로 나가게 됐다. 서울에서 함께 러시아어 학원을 다니다가 쌍트 뻬쩨르부르크(舊 레닌그라드)로 유학을 간 학원동료가 그 전날 모스크바 친구 집에 와있다고 전화를 해 만나기로 한 것이다.
아직 모스크바 시내가 낯설 던 때라 열심히 지하철 노선표를 연구한 끝에 한번 갈아타고 Arvat 거리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상으로 나와보니 주변에 지표로 삼을 만한 낯익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영어는 한마디도 안통하는 상황에서 “Arvat, Arvat”만을 되풀이해서 행인으로부터 방향을 알게됐다. 아는 곳이 없어 미국 햄버거가게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터라 이미 약속시간이 지난 상태에서 뛸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마구 뛰어가는데 행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기숙사 동료인 어린 유학선배가 말한 것이 기억났다. “버스에서 가끔 소매치기 때문에 검문이 있는데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세요. 가능하면 택시를 타시구요. 러시아 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해받으면 큰일입니다. 러시아 경찰은 일단 마구 때리거든요. 나중에 결백이 밝혀져도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남들의 이목을 끌 행동은 가능하면 하지 마세요.”
서서히 추워지던 때였는데 행인들은 옷깃을 여미었을 뿐 종종걸음을 치는 이마저 없었다. 주말 오전에 무슨 바쁜 일이 있어 뛴단 말인가?
난 뛰던 걸음을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새삼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2달 동안 뛰는 러시아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음을 기억해냈다. 걸핏하면 종종걸음을 치거나 옆 사람과 경쟁하듯 빠른 걸음으로 걷는 우리네의 이상한 버릇도 생각났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여유로운 점심을 생각하며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조차 우리는 뛰듯이 걷는다.

(2) 03년 9월, 싱가폴
회사의 동료가 싱가폴로 온다기에 그를 만날 겸 취재거리를 찾아 고속버스편으로 싱가폴에 갔다. 동료와 만나기로 한 호텔을 찾아 택시 하나를 잡았다. 밤길인데다 비까지 내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다행히 50중반의 택시기사는 아주 점잖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틀 후 취재를 위한 택시대절 요금 협상까지 마치고 호텔에 도착했다.
다음날 동료를 만나고 기자는 예정대로 택시 기사와 만나 싱가폴 시내와 대학가, 컨테이너 부두 등에 대한 취재에 나섰다.
지하철역 취재를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기자가 시간제로 대절한 택시 요금이 생각나 종종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계단 오르듯 걸어 올라가자 택시 기사가 카메라 삼각대를 들고 뒤따라오며 “웬 걸음이 그리 빠르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택시 요금 때문이라고 말하기 싫었던 기자는 “원래 버릇”이라고 대답했다.
대화는 싱가폴 국립대학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계속 이어졌다. 택시 기사는 말했다.
“한국과 일본 승객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택시를 타고도 계속 시계를 보거나 창밖 주변을 부지런히 살핀다. 결코 관광차원의 눈길이 아니다. 그래서 ‘바쁜가, 약속에 늦었는가’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한다. 사업차 왔느냐고 물으면 관광객이라고 한다. 참 이해가 되지 않더라. 싱가폴도 바쁜 사람이 많은 곳이다. 그래도 한국이나 일본 사람을 보면 항상 더 바쁜 것 같다. 단체 관광객들도 어디에 가면 죽 서서 사진을 찍고는 또 바삐 버스로 뛰어간다. 관광도 바삐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기자는 뜨끔했다. 그리고 속으로 깨닫고 있었다. 우리와 일본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3) 03년 10월, 콸라룸푸르.
기자가 다니고 있는 말레이시아 국립대학의 언어연수과정에는 모두 6명의 학생이 있다.
개강한 지 얼마 안되던 어느 날 ‘대학역’에서 전철을 타고 일본 학생과 시내로 나갔다. 가장 번화한 KLCC(쌍둥이 빌딩)의 지하 역에 도착한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게 됐다. 책 몇권과 생필품을 사고 점심을 때운 다음 우리는 30여분만에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게 됐다.
그때 일본 친구가 말했다. “저 고장난 에스컬레이터가 아직도 안 고쳐졌네. 일본같으면 밀리는 행인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텐데.”
기자가 대답했다. “그래. 서울 같아도 뛰어다니는 승객들이 아마 지하철역과 본부에다가 전화께나 했을 거야. 일본도 엄청 바쁜 나라 아냐 ?” 우리 둘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나는 7년전 모스크바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콸라룸푸르에 온 지 2개월반 동안 뛰거나 종종걸음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다. 어쩌다가 중국인이 뛰는 모습은 봤지만 아침에 대학 가는 길에서도 뛰는 학생들은 없었다.

(4) 03년 10월, 한국.
여러분은 오늘도 뛰고 계시지 않습니까? 꿈에서조차 왜 우리는 늘 뛰는 것일까요?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10분만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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