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야행(貞洞夜行). 서울의 한 자치구가 5월의 끝자락에, 정동 일대에서 펼치는 문화축제다. 교교(皎皎)한 달빛 스미는 정동의 밤길, 아내와 같이 아련한 추억의 갈피를 헤며 인파에 끼여 돌담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기화요초(琪花瑤草), 싱그러운 5월에는 행사, 기념하는 날이 유난히도 많았다. 나도 여기에 숟가락 하나 더 얹듯 나만의 중요한 추억의 ‘이벤트’를 만들었다. 문화 축제의 한 맥으로 13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한다는 미국 대사관저를 먼저 찾았다.

1970년대 하비브 대사의 설득으로 한옥으로 지어졌다는 미 대사관저는 일명 ‘하비브 하우스’라 불리기도 한단다. 잘 가꾸어진 정원, 정감어린 한옥이 친근감을 더했다.

40년 전 5월 중순, 나는 남대문 근처 남산 오르는 언덕길, 옛 도뀨호텔 커피숍에 비장(?)한 각오로 앉아 있었다. 30대 중반에 맞선이 약속돼 있었던 것. 커피숍을 나온 우리는 덕수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고풍스런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궁 안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첫 데이트를 했다.

 그러다 ‘덕수궁에서 첫 데이트를 하면 그 만남은 이별이 된다더라’라고 하는 말이 불현 듯 생각이 났다. ‘아뿔싸!’ 순간 후회했다. 근거 없는 루머일 것이라고 치부하면서도 가요 ‘덕수궁 돌담길’이 떠올랐다.

오늘 다시 그 길을 걸으며 오래 전 옛날을 추억해 본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그때의 아내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 중학교 2학년
어머니에게 서울구경을 시켜 달라고 무던히도 졸랐었다. 서울 나들이는 지방 소년에겐 간절한 로망이고 자랑거리였다. 어머니를 따라 서울 사는 아주머니와 덕수궁에 찾아갔다.

대한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에 소나무 숲을 품은 작은 동산(지금은 평지에 카페가 있다)과 연못이 있었다. 해는 저물고  땅거미 지는데 동산에선 희한한 움직임들이 눈을 의심케 했다. 청춘 남녀들의  애정행각이 무성영화 돌아가듯 요란했다.
동백기름 자르르 쪽찐 머리에 단아하신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그 광경에 몹시도 당황하시며 놀라시고는 나를 돌아 보셨다. 시골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 서울이란 곳은 다 이런가? 어린 나는 처음 목격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고나 할까? 60년 전의 일이다.

# 대학교 1학년
덕수궁 앞길 끝자락 즈음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광화문 광장. 휑뎅그렁한 광장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4.19 혁명’ 학생 데모대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지 8일 만에, 서울 지리도 모르는 지방 출신이 동기들과 스크럼을 짜고 목청껏 독재타도를 외치며 경무대로, 동대문 경찰서로 열심히 뛰었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담장이 높아 위압적이긴 하나 사계절 운치와 서정이 넘치고 근현대적인 족적을 반추 할 수 있는 길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

고종이 거처하던 함녕전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란은 수백년 수림의 오솔길에 비치는 전각의 전깃불이 사색과 태고의 정기를 누리며 이른 밤 산책하기에도 운치 있는 곳이었다.

대한문이 데모대나 시위장소로 점거되고 이번 축제기간에도 천막치고 현수막 나부끼며 철야농성 하는 사람들이 있어 마음 한쪽이 짠했다. 언제쯤 한마음을 이룰 수 있을까?

덕수궁 돌담길, 정동 일대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걸으며 추억의 갈피 한장 한장이 주마등처럼 흐른 하루였다. 많은 추억 어린 그곳엔 정겨움이 있다.

■글 : 임충규(중우회장)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