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병무(한남대학교 겸임교수)

세상은 보아야 믿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 있어 보지 않아도 믿는 사람이 있다. 신을 믿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믿지를 못하는 사람은 신을 본적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창업 상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당장에 얼마를 현금으로 지원해준다 하면 속된 표현으로 벌떼같이 달려드나 경영의 지혜를 주는 교육을 받으라고 하면 고개를 절래 흔든다.

유태인 상술에도 나와 있는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라’는 참 진리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통사람들 대부분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둡다. 신발 사러 가는 사람의 눈에는 신발 가게만 눈에 들어오고 미장원을 다녀오면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만 시선이 집중된다.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매일 매일 만나는 버스에는 수많은 광고가 있다. 생각나는 것을 기억해 써보라고 하면 그 많던 광고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아침 저녁 지나다니며 보는데 도대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세상은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화(造花)도 그게 가짜인줄 알 때까지는 진짜 꽃이다. 빌려온 가짜 진주 목걸이를 잃어버리고는 그걸 진짜로 갚으려고 평생을 고생한 모파상의 어느 여인의 이야기는 이를 잘 반증해준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있다. 세상은 있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게 다 보인다면 대뇌 중추는 너무 많은 자극의 홍수에 빠져 심한 착란에 시달리게 될 꺼다. 그러기에 대뇌는 많은 자극 중 몇가지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선택의 기준은 그때그때 대뇌의 튠(tune)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머리 나쁜 사람들은 참으로 고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공평한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회사에서 신입사원에게 머리빗을 한묶음씩 나눠 주면서 절에 가서 빗을 팔아오라는 주문을 했다.

첫번째 사람은 머리가 없는 스님을 상대로 어떻게 팔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포기해 단 한개도 팔지 못했다.

두번째 사람은 스님을 상대로 빗을 사용해 머리를 문지르면 통증이 가시는 부수적 기능이 있으니 사시라 해 두개를 팔았다.

세번째 사람은 스님이 총 50명인 절에서 100개를 팔고와 그 연유를 물으니 “스님 자신은 빗이 필요 없지만 연간 찾아오는 여신도 수를 말하고 그들이 절에 와서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예불 할 수 있도록 화장실, 식당, 응접실 등에 놓으면 그게 얼마나 큰 자비요 서비스인가”를 설명했더니 모두 감탄해 한박스를 사서 곳곳에 놓았다고 한다.

이렇듯 세상은 어떻게 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같은 방향에서 부는 바람에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연(鳶)이 있는가 하면 곤두박질하는 연이 있다. 컵 속의 반잔은 보는 사람에 따라 반이 비워졌다고 볼 수 있고, 반이 채워졌다고 볼 수 있다. 비었다고 울든지 채워졌다고 웃든지 이는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있다.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 요즈음 불경기라고 창업을 기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불경기라서 임대료도 낮아지고 경쟁 점포도 정리돼 오히려 좋은 조건이라며 창업을 서두르는 사람도 있다.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반전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이토록 세상은 보는 대로 존재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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