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전시]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

서울시립미술관(SeMA)에서 다음달 8일까지 열리는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전은 전시 제목이나 입구의 설명에서부터 머리를 싸매게 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 같으면서도 지적 탐구를 요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그렇고, 동아시아 여성의 페미니즘이라면 억압, 전통부터 떠오르는데 거기다 전시장 외벽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쓰인 페미니즘의 사전적, 학문적 설명이 빼곡하게 도배돼 있다. 젠더, 재현, 담론, 타자화 등등의 단어를 읽는 것만으로도 전시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막상 전시장을 둘러보니, 도슨트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공감대가 큰 게 아닌가 싶다가도, 일단 “아름다우니까”라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겠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서 초대된 14명의 작가들은 사진 영상, 설치 미술, 인터뷰, 조각, 그림 등 다양한 방식의 작품을 선보인다. 소재 상으로는 천과 실 작업이 두드러진다. 
중국 설치 미술가이자 직물 디자이너인 린 타안미야오는 실제와 가짜 뼈, 망치, 절단기 등을 은실로 감은 작은 조각들을 잔뜩 늘어놓은 ‘많거나 적거나 마찬가지’를 출품했다. 중국 전통 문화에서 실크가 가지는 의미와 반복적인 수공업 노동을 통해 재탄생된 괴기스럽기까지 한 조각품 역시 고단한 여성 삶의 은유이지 싶다. 

일본의 설치 미술 작가 치하루 시오타는 순백의 롱 드레스들을 매달아놓고, 그 사이를 거미줄 치듯 비정형의 검은 실로 감싼 ‘꿈의 이후’를  선보인다. 10명이 100시간 노동 끝에 완성했다는 이 압도적인 작품 사이를 걸어보면 경건한 의식, 혹은 죽음의 통과 의례를 치르는 기분이 든다. 침대, 창문, 드레스, 신발, 서류 가방 등의 일상 사물과 설치, 퍼포먼스를 결합시키는 시오타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사물에 심어진 인간의 기억들 간의 관계 탐구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자료 수집, 피트니스 센터의 기구들, 나무와 성적 판타지의 연결, 심청가 재연 비디오 작품 등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것, 살아갈 미래를 예술로 사고하는 정점에 유일한 남성(?) 작가인 홍콩의 밍 웡과 그의 인터뷰 영상, 사진, 퍼포먼스 영상물이 놓인다.

짙은 화장을 하고 몸에 꼭 맞는 중국 전통 여성 의상을 입고 노래하거나 술집에 앉아 있는 밍 웡의 사진 속 모습은 <화양연화>의 장만옥을 떠올리게 할 만큼 고혹적이다. 청중 앞에서 지극히 여성스런 자태(목소리만 아니라면 이보다 완벽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여성은 없어 보이는데)로 현대 미술에 관한 잠언과 선언을 들려준 후, 하나씩 옷을 벗는 ‘홍콩 다이어리’는 아름다운 충격이다.

화려한 손톱 화장을 하고 노래하는 ‘비지 디바’‘ 시리즈, 터키의 팝 싱어이자 트렌스젠더인 뵐렌트 에르소어의 삶을 다룬 영상과 설치 작업 ’‘이스탄불 다이어리’까지, 밍 웡 작품만큼은 시간을 들여 찬찬히 모두 감상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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