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하순에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연간 정례 프로그램인 ‘경제 통상 정책 2003년 과정’에 초청 돼 해당 과정에 참가했다.
이번 케네디 스쿨에는 6개 대륙에 걸쳐 32개국으로부터 정부, 국제기구 및 민간 분야의 관계자가 참석해 서로 자국의 이익과 자기가 속한 국제기구의 이익 그리고 각자 민간 기업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이 미국을 비롯한 관계국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기회였다.

21세기는 제한주권 시대
21세기에 들어와 국제정치학자들은 우리가 강대국이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제한적 주권을 행사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동의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 힘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 이라크 전쟁을 지켜봐도 UN에서 거부권을 행사해 오면서 강국이라고 스스로를 여겼던 프랑스까지 나서 반대해도 자국의 기준에 따라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했다. 안하무인격으로 시작했던 전쟁의 결말이 쉽게 나지 않고 지지부진하자 이번에는 다시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오늘날 미국주도의 국제 질서인 셈이다.
세계무역기구 칸쿤 협상 회의장 밖에서 자살한 이경해씨의 경우는 큰 화제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살행위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평가를 했다.
심지어 어느 참가자는 회의장 밖에서 자살할 것이 아니라 국제 무역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면 된다는 극단론을 펴는 이도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국제화는 무엇인가? 우리가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것이 뻔하다.
우리가 필요한 것만 상대에게 원하고 우리가 조금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우리의 입장만을 외치다 보면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우리의 미래는 그리 밝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 무역협정에 대한 협상을 개시하고 그 외의 나라와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그런 논의를 주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정부 대표자들도 해외에만 나가면 거창하게 늘 자유무역이야기를 꺼내지만 정작 국내에 돌아와서는 농산물 등 보호 무역 정책을 고수하는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을 마무리 하겠다고 나선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마무리가 안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불행하게도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지연의 책임이 칠레 측에게 있다기보다는 우리측에 있다는 국제 분위기를 국민들은 얼마나 피부로 느끼고 있는지. 지금 외국에서는 한국이 개방에 관해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철저한 변신이 국제무대 생존 비결
그러나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에서 온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한국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능력 있는 민족으로 그리고 21세기에 아시아를 대표하며 나름대로 역할을 해나갈 국가로 여기고 있다.
어느 사회학자는 국제무대에서 살아 남는 민족은 강자나 머리가 우수한 민족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해가는 민족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21세기형 생존의 방법은 무엇인가.
막연한 감성 논리보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대외 의존도, 특히 대미 의존도가 어느 나라보다 높은 정치, 경제, 국방 구조를 가진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세계는 한국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박찬동(시그마투자(주) 대표이사)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