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훈(ASE코리아 본부장)

반도체 제조를 주력으로 하는 어느 대기업 회장이 과장급 일선 관리자들에게 ‘장비가 품질’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신의 고가 장비를 사용하면 확실히 제품 품질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수율이 상승하고 UPH(시간당 생산량)도 개선된다. 하지만 자동화된 장비라 해도 그를 운용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어느 제조업체 라인에서 벌어진 일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시간에 쫓긴 생산직 사원이 무의식중에 불량품을 양품 박스에 넣는 일이 발생했다. 그 불량품은 조립라인을 거쳐 완제품에 장착되고 필드에서 불량이 발견되고 말았다.

불량품을 납품한 회사는 결국 1000억원대의 배상 요구를 받게 됐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이렇게 회사의 명운을 가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완벽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풀프루프 (fool-proof)다. 말 그대로 바보라도 실수를 저지를 수 없게 한 장치다. 불량품이 발생하면 장비가 멈추고 양품 박스는 즉시 닫혀 투입이 차단되며, 불량품 박스에 센서가 장착돼 있어 불량품을 투입해야 다시 장비의 가동이 가능하도록 개선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도 그런 식으로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외국 여행객이 귀국하는 공항에서 의심환자가 열 감지기에 포착되면 시스템이 연동해 입국 심사대 출구가 자동 봉쇄됐다면 피해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늦은 감이 있었지만, 각 병원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서 국민이 일치된 모습으로 현명하게 대처해 그나마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풀프루프 시스템 구축은 적은 비용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손실비용을 생각하면 투자 대비 이처럼 현명한 투자가 없다.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풀프루프 시스템을 응용할 수 있는 분야는 셀 수없이 많다.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시스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제도적 장치’라는 것인데, 처음에는 대부분 작동하다가 기득권층의 반발에 직면해 그 기능이 약화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제도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기에 상황에 따라 수정 보완될 수 있지만, 그 근본 취지마저 퇴색돼서는 안 된다.

소수 이익 그룹의 주장에 밀려 예외를 계속 허용하면 안 된다. 그런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지키기 못해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다가 빈곤한 국가로 추락한 국가들이 있다.

이런 국가에서 요행히 부유층에 속한다 한들 자긍심을 지킬 수도 없다. ‘진 팀에 이긴 사람 없고 이긴 팀에 진 사람 없다’는 격언이나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에서 자신의 집만 호화롭게 꾸민들 공멸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 업종이나 마찬가지지만, 제조업은 특히 대만의 2.5배에 이르는 인건비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만에서는 필리핀 근로자를 쉽게 볼 수 있다. 기술직은 물론 관리직에도 상당수 진출해 있다. 기업의 규모에 관계없이 필리핀 근로자를 쓸 수 있다 보니 제조업 경쟁력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없다. 결국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절대 품질과 속도의 경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절대 품질은 사람이 아닌 전 공정에 걸쳐 구축된 풀프루프 시스템을 통한 품질사고 예방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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