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사이트]‘고급차’선언한 제네시스

지난 9일, 현대자동차그룹은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제네시스 EQ900’의 신차발표회를 가졌다. 제네시스 EQ900은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이자 플래그십 세단이다. 앞서 지난달 4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제네시스가 별도의 자동차 브랜드로 선언한 바 있다.

제너시스 EQ900의 탄생은 현대자동차도 토요타의 럭셔리 브랜드인 렉서스나 폭스바겐의 럭셔리 브랜드인 아우디와 비슷하게 고급차 시장에서 본격적인 질주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특히 EQ900의 신차 발표회는 정몽구 회장이 직접 단상에 올라 행사를 주관할 정도로 제네시스 브랜드에 거는 기대감을 한껏 전달하기도 했다. 이날 현대차는 “EQ900의 신차발표회는 제네시스가 현대차와 이원화 된 최고급 브랜드로서 실질적인 첫 제품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세계 어느 명차와도 견줄 수 있는 하이엔드 모델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제네시스’ 브랜드가 자리를 확고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고급 브랜드라는 정체성 확립이 관건
당장 제네시스 EQ900에 대한 국내 소비자 반응은 상당히 뜨겁다. 공식 출시일 하루 전날인 지난 8일 사전계약 물량이 1만대를 넘어섰다. 대중적인 자동차 모델도 아닌 플래그십 세단이 사전계약 1만대를 돌파한 것은 국내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기존에 현대차의 플래그십 세단인 그랜저와 에쿠스가 공식 출시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었다.

제네시스 EQ900은 현대자동차의 미래를 짊어지는 중요한 견인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의 미래가 여기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영 승계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정 회장과 정 부회장이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고급차를 완성하는 일은 향후 현대자동차의 고속질주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랜저나 에쿠스는 세계 고급차 시장에서 제대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벤츠, BMW, 폭스바겐과 같은 독일 명차들이 이 시장을 거의 점령하고 있어서도 있지만, 대중차 시장과는 다르게 고급차 시장은 자동차 회사가 쉽게 진입할 수 없는 기술과 품질의 고품격 경연장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네시스 EQ900은 고급차 세계시장에서 현대차의 존재를 알리는 진짜 도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현대자동차가 해야 할 일은 세계시장에서 제네시스가 고급차 브랜드로 인정받고, 성능과 디자인의 검증을 제대로 받는 것이다. 과연 제네시스가 그러한 꿈의 열쇠가 돼줄 수 있을까?

우선 현대자동차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렉서스라고 하면 편안함과 정숙성을 떠올리고, 벤츠라고 하면 고급스러운 명차의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제네시스라고 하면 특정 브랜드 정체성이 딱 하고 떠올라야 한다.

일단 현대자동차는 제네시스를 흔한 럭셔리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모양이다. 현대자동차가 발표한 제네시스의 브랜드 정체성은 ‘인간 중심의 진보(Human-centered Luxury)’라고 한다. 말 그대로 사람을 위한 기술과 성능과 디자인 등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자들이 제네시스를 볼 때면 인간 중심의 진보라는 감상이 바로 느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실상 바로 이 정체성의 확립이 제네시스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소비자와 제네시스 간에 정체성에 대한 궁합이 딱 맞지 않으면, 자동차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루이비통, 구찌, 프라다와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오랜 시간과 정성과 비용을 아끼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담겨 있다. 그래서 제네시스는 명품 브랜드 전략을 차용한 정체성 구축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브랜드가 제대로 정립됐다고 해서 현대자동차가 고급차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고급 브랜드의 위상은 기본적인 인지도와 시간의 싸움이다. 현대자동차가 선전하는 북미 시장에서 기존 제네시스 브랜드에 대한 인기는 여전히 미약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브랜드로 재탄생했다고 해서 판매량을 확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현대자동차가 대중차 전문 자동차회사라는 이미지와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완전히 별개로 밀고 가는 작업도 중요하다. 독일의 국민자동차 브랜드인 폭스바겐이 대중차와 고급차 브랜드를 각각 분리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차의 대중차와 고급차 전략은
고급차 시장을 겨냥한 플래그십 세단이 전략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하면, 이른 바 ‘판매간섭’에 대해서는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판매간섭이란 현대차나 기아차가 독립적인 제네시스 브랜드와 충돌할 수 있는 모델을 선보였다가는 제네시스와 시장 경쟁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현대·기아차그룹은 대중 브랜드에 전념하고, 제네시스는 고급 브랜드에 올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차는 일단 자사의 라인업 가운데 최상위 급이 아슬란이 된다는 이야기다. 아슬란을 필두로 그랜저, 쏘나타 모델이 뒤를 잇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아슬란과 그랜저 등의 해외 수출 성적이 저조하다는 것인데 이러면 현대차는 아슬란 급의 플래그십 세단의 새로운 개발이나 전략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제네시스 브랜드가 성공한다고 해서, 현대차나 기아차가 성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각각 별도 브랜드이기 때문에 자사 브랜드의 성공전략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뜻이다.

기아자동차도 같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모양새이다. 기아차의 최고급 모델은 K9인데, 이 모델 역시 아슬란과 비슷하게 판매량이 미미한 편이다. K9은 지난 11월까지 5600대 정도 팔았다. 사실상 현대·기아차는 독일 럭셔리 자동차들이 국내 시장을 조금씩 확장하는 분위기를 역전시키기 위해 각각 아슬란과 K9을 선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슬란과 K9도 수입차 시장의 성장세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선전했던 모델이 기존의 제네시스나 에쿠스였다. 이제 새롭게 선보인 제네시스 EQ900이 별도의 독립 브랜드로 현대·기아차의 고급차 전략을 이끌고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현대차와 기아차는 자체적인 라인업을 고급차 지향이 아닌 대중적인 모델 지향으로 변경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랜저나 아슬란의 가격이나 성능도 기존보다 더욱 세밀하게 나눠지고, 대중적인 이미지로 변신할 여지가 높아지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랜저와 제네시스 EQ900가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세계적인 플래그십 세단을 보유한 세계 자동차 회사들이 한차례씩 겪고 있는 변화다.

토요타도 자사의 최고급 모델인 아발론의 연식변경 때마다 렉서스와의 판매간섭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닛산도 맥시마를 연식변경할 때마다 인피니티와의 판매간섭을 고민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현대·기아차가 대중 브랜드로 탈바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여전히 자동차가 자신의 부를 나타내는 지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용적인 대중 브랜드로 거듭나려고 해도 국내 소비자들이 대중차 보다는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차를 선호한다면, 대중화 전략도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의미다. 고급차와 대중차의 각기 다른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자칫 둘 다 놓칠 수도 있다는 걸 염두해야 한다.

제네시스와 정의선의 상관관계는
제네시스의 성공은 현대·기아차의 후계구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정의선 부회장은 실질적으로 기아차를 이끌면서 경영능력을 조금씩 인정받아 왔다. 그가 독자적으로 추진해 성공한 대표적 사례는 기아차 모하비 정도다. 하지만 이제는 그룹 전체의 미래를 이끌만한 강력한 리더십과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아버지의 그늘에 벗어나 그를 최고경영자의 자리로 인도할 차량이 바로 제네시스라는 것이다.

신차 발표회에 앞서 지난달 4일에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된 제네시스 독립 브랜드 론칭 행사가 있었다. 이날 무대에 올라 새로운 브랜드의 선언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정의선 부회장이었다. 지난 2009년 YF쏘나타 신차 발표회 이후 6년 만에 등장했다. 무엇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겠다고 밝힌 자리였다.

이날 정 부회장은 말했다. “10년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현대자동차는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또 그는 “기대와 떨림이 교차한다”며 상기된 얼굴도 보여줬다. 지금 현대자동차그룹은 세계시장의 선두권으로 나설 수 있는 교차로에 진입했다. 제네시스가 얼마나 달려줄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 글 : 김규민기업전문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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