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천경자 화백 1주기 추모전

최근 한국 미술계에 악재가 적지 않다. 가수 조영남의 그림 대작 사건, 화가 이우환  그림 위작 사건, 그리고 화가 천경자의 <미인도>와 관련된 차녀의 소송 사건 등. 이러한 우환 중에도 천경자 작가의 1주기를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1주기 추모전 :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전(8월7일까지)이 열리고 있어, 그림을 아끼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천경자 작가(1924~2015년)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 소장한 <미인도>에 대해 “내가 그린 게 아니다. 어떻게 어미가 자식을 못 알아보겠느냐”고 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관계자 등이 진품이라고 판정하는 바람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건강도 악화돼, 80대에 뉴욕에 사는 큰 딸에게로 갔다.

1998년 11월에 일시 귀국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에 제작한 채색화와 스케치 등 93점과 저작권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자신의 작품이 흩어지는 걸 원치 않았던 작가의 뜻을 받들어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 전시실이 마련됐고, 기증 소장품 전부와 개인 소장가 등의 작품을 더한 107점으로 1주기 전이 기획됐다.

동양화나 한국화라 하면 수묵 산수나 문인화 정도를 떠올리는 일반인에게는 물론, 추상미술이 주도하던 근대 화단에서 자신만의 형상화 양식과 강렬한 채색으로 독창적 작품 세계를 추구했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천경자. 한때 일본 채색화의 아류라는 오해도 받았지만,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뱀 그림 <생태>에서 해외여행 스케치기를 거쳐 완숙기의 대작들까지, 꾸준히 작품 세계를 확장 발전시켜 한국 채색화의 독보적 존재로 대접받고 있다. 

‘천경자 1주기 추모전’의 부제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는 자유로운 영혼을 자처했던 천경자 작가를 잘 표현해주는,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저서 <자유로운 여자>(집현전, 1979년)에 실린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인생이 떠있는지도 모른다”에서 가져왔다.

전시의 한 코너는 수필집, 자서전 등 20여권의 책을 낸 작가의 글, 사진, 기사, 삽화, 영상 등의 아카이브에 할애됐다.

그림은 세주제로 나뉘어 전시된다. ‘인생’에는 작가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다니던 학생시절 작품부터 6·25 전쟁 직후 사회적, 개인적 혼란의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 그렸던 <생태>(1951)를 지나 <고>(1974),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막은 내리고>(1989)와 같은 대표 자화상과 여인상 작업들이 걸려 있다.

이 중 <생태>는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주요한 작품이다. 현실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소재로 뱀을 택해 35마리를 그려 넣었는데, 세종류의 뱀이 우중충하지 않고 울긋불긋 생생하고 생동감 있게 얽혀있다. 현실에 굴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결기가 담긴 작품으로, 이후 작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수호 모티브로서 뱀을 즐겨 그려, 뱀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했다.

‘여행‘에서는 1969년에서 1997년까지 17개국을 여행하며 그린 ‘여행 풍물화’로 분류되는 스케치, 크로키 등을 볼 수 있다. 해외여행 풍물화는 작가의 별도 작품 군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계속 이동하며 그림을 그려야했기에 그림 크기가 작은 편이다. 물감도 아교에 개어 쓰던 동양 석채만이 아닌, 과슈 같은 튜브에 담긴 서양 물감을 쓰기도 했다.

‘환상’은 <초혼>(1965), <백야>(1966)와 같이 몽환적인 색채와 강한 필치의 1960년대 작품, 완숙기 작품인 <환상 여행>(1995)과 <황혼의 통곡>(1995) 등이 배치된, 미지 세계와 내세 관념을 확인할 수 있는 코너다.

특히 <환상 여행>과 <황혼의 통곡>은 서명 없는 미완성 작으로, 지우고 덧칠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작품 완성 기간이 남달리 길었던 작가의 치열한 작업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과 대화하며 마음에 들 때까지 작업하다 마음에 들어야 붓을 내려놓고 사인을 하는 꼼꼼함으로 50여년 화업에 비해 작품 수가 적은 작가가 천경자다.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도 많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와 함께 하는 전시 투어, 전시와 연계된 강연과 심포지엄,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프로그램 날짜를 맞추기 힘들다면, 매일 오후 1시와 4시에 진행되는 도슨트의 그림 설명 시간이라도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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