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대도시에는 중국계 학교들이 많다. 이 학교들도 ‘중국인’을 키우고 있다. 이들 중국계 학교에서는 ‘商術’이 아닌 ‘Business Mind’를 키워주고 있다.
한 한국 교민의 아들은 중국학교를 다니고 있다. 어느날 이 녀석이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행사를 하니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김밥과 잡채를 준비하기로 하고 몇 사람분이 필요한 지 물었다.
아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30인분’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선생님들 몫도 있나보다”하고 정해진 날에 음식을 만들어 줬다. 그 날 아들은 함박 웃음을 띄우며 평소보다 조금 늦게 귀가했다. 아들은 “칭찬 받고 상도 탔다”고 자랑했다.

학교에서 바자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판매용 김밥과 잡채를 준비해 갔다. 1인분에 말레이시아 한끼 평균 가격인 3링깃(930원쯤)으로 가격을 정했다.
음식을 품평한 학급회의에서 “그것은 너무 싼 가격”이라며 6링깃으로 책정됐다. 바자회가 열리자 음식은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다.
그러자 1인분의 양을 3분의 2로 줄였다.(실제 가격은 8링깃으로 오른 셈이다)
마지막 10인 분은 양을 절반으로 줄였다.(1인분 가격이 사실상 12링깃으로 인상)
바자회가 끝나고 각 학급의 이익금 순위를 매긴 결과, 이 학급이 학교 전체 1등을 차지했다. 1등 상금으로 이 반에 얼마간의 금일봉이 주어졌고 바자회 이익금과 함께 학급 운영비로 큰돈이 입금됐다.
바자회가 끝난 다음, 선생님은 학급이 우승을 차지한 이유에 대해 학생들에게 토론하게 하고 ‘김밥과 잡채’의 가격 책정과 그 변동 과정을 특히 칭찬하며 시장상황에 빠르게 적응한 영업활동의 순발력을 성공의 비결이라 진단했다.

중국계 학교의 철저한 경제교육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 여러분의 느낌이 어떤지 무척 궁금하다. 그 한국 교민은 한국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대다수의 반응이 “학교에서 그러면 쓰나?”였다고 말했다.
더구나 중국계 학교에서는 우등상을 현금으로 준다는 사실을 한국인에게 전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돈 밖에 모르는 XX, 학교까지 그러나”하고 욕설까지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겉과 속이 다른 한국사람들
우리의 주변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돈 많이 벌어서 싫은 사람이 있는가? 좋은 물건 싸게 사서 싫은 사람이 있는가?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나는 돈을 열심히 벌테니 넌 돈 걱정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하며 자식이 부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배려(?)한다. 우리는 돈을 좋아하고 돈을 벌고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자녀들이 가난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돈의 의미’는 부정하고 산다.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그네들을 이해하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과 똑같이 가난하게 살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많이 벌어서 사회에 그만큼 많이 환원하고 불쌍한 이웃들에게 많이 기부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돈의 의미’는 무한대에 가까운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 가정도, 우리 학교도, 그런 ‘돈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의 의미’와 실질적인 경제활동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토대 위에 도덕심과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심어줘야 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빈부간 갈등의 요체는 무엇인가? 빈자만 비난할 수 있는가? 걸핏하면 ‘과소비’, ‘호화사치 여행’ 등이 언론에 나오며 모든 부유층이 무슨 범죄자가 되는 것처럼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평생 모은 재산을 쾌척하는 부자 노인이 언론을 크게 장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은 청년실업가(?)가 갑자기 쇠고랑을 차고 언론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정과 학교에서 ‘돈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학교 바자에서 이미 영업활동으로 두드러진 평가를 받고 사회(학급)에 그만큼 기여하던 친구가 사회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게된다면 그 방면에서 열등했던 학급친구가 사회에서 가난하게 산다고 그 부자 친구를 욕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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