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문수-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전무이사

1966년 4월16일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에 입사했다. 만 51년이 지났다. 공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살 풋내기였다. 처음으로 맡은 업무는 자동차부품 검사원이었다.

정부는 1962년 10월4일 수출검사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1964년 12월30일 54개 공산품을 검사 대상품목으로 지정했다. 지정물품을 수출하고자 하는 자는 검사기관에 수출검사를 신청해야 하며 합격증이 첨부돼야 수출통관을 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중앙회 산하 자동차조합을 비롯한 자전거, 직물, 메리야스 등 17개 협동조합이 수출검사기관으로 지정돼 1965년 2월1일부터 수출검사를 실시하게 됐다.

자동차조합은 1965년 1월5일 ‘한국자동차부품 수출검사소’를 지정받았다. 수출검사기준 및 방법, 단체규격제정을 완료하고 검사기계·기구시설을 조합 내에 보유했다. 수출검사지정 품목은 피스톤 등 13개 품목이었다.

공장에 직접 가서 검사기준에 따라 엄격하고 공정한 검사를 실시했고, 사무실로 돌아와 결재를 받은 후 검사합격증을 교부해 줬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등 선진국과 기술제휴도 없는 상태였지만 우리나라가 수출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해 품질수준이 비교적 우수했다. 1966년도에 14개 회원업체가 5개 국가에 64만9000달러 수출했던 기록을 볼 때 본인도 수출증대를 위해 일조를 했다는 생각으로 뿌듯함을 가지고 있다. 이 업무는 1968년 4월1일 정부방침에 따라 국립공업연구소(현 기술표준원)로 이관됐다.

이후 새로운 업무를 맡은 것이 미군 잉여물자(자동차용 엔진 및 변속기, 차축 등)불하 사업이었다.

상공부 수입과에서 미군 잉여물자 차량 및 부분품에 대해 고시(PL)가 나면 조합에서는 구매품목 및 희망가격을 결정한 후 중기중앙회의 날인을 받아 상공부에 서류를 제출했다. 중기중앙회가 신청자이고 자동차조합은 실수요 구매기관으로 고시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배정이 확정되면 중소기업중앙회 담당자와 함께 부평에 있는 미8군에 가서 확인절차를 거친 후 잉여물자를 트럭으로 옮겨 서울로 운송했고 엔진은 남영동 소재 서울세관 보세창고로 운반했다. 자동차용 엔진은 자동차 조립·판매 후 등록 할 때 증빙서류로 개별통관 면장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중기중앙회에 자주 출입하다보니 조합에서는 자연적으로 내가 중기중앙회 출입 담당직원이 됐다. 당시에 자동차조합은 중기중앙회의 설립멤버이며 임원조합이기도 해서 모든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 줬다.

중기중앙회가 지난 2012년 발간한 50년사 화보에 1971년 9월 29일 약 60여명이 참가한 협동조합 직원 강습회에 필자의 모습이 있는 걸 보면 새삼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필자는 지난 50년간 중기중앙회가 감리회관, 세종빌딩, 공평동회관, 여의도 시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성장해 온 과정을 지켜보면서 남다른 감회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중기중앙회는 출범 이후 정체성, 정책성, 대표성, 자조성을 구축했다.

중소기업의 권익대변,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소상공인보호, 노란우산공제, 홈쇼핑 사업 등 중소기업 경제 단체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하고 있는데 대해 지면을 빌려 감사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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