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라운지] 행동주의자가 된 대형 운용사들

기업판 메이웨더 대 파퀴아오의 복싱 대전을 보는 듯했다. 듀폰이 투자자 넬슨 펠츠(Nelson Peltz)와 듀폰의 이사 선임을 놓고 세간의 이목을 끄는 대리전을 펼쳤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부상상태에서 싸운 파퀴아오처럼, 펠츠도 대부분 사람들이 잊고 있던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결투에 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듀폰과 펠츠는 각자가 지지한 이사 후보자의 선출을 위해 수 개월간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한 곳은 대부분의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세개 기업이었다. 바로 블랙록(BalckRock), 뱅가드 그룹(Vanguard Group), 그리고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다.

이 자산 운용사들은 듀폰의 대주주들이다. 펠츠의 트라이언 펀드 매니지먼트(Trian Fund Management)도 상당 규모의 듀폰 지분(2400만주)을 보유했지만, 세개 운용사들의 총 지분에는 훨씬 못 미쳤다. 이들은 개인투자자들을 대신해 1억5000만주를 보유하고 있다.

듀폰 주주총회가 열리고 자산 운용사들은 듀폰의 경영진이 추천한 이사를 지지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결국 접전이었던 싸움의 결과에 종지부를 찍었다. 듀폰의 경영진이 판정승을 거뒀지만 사실상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승리를 안겨준 셈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펠츠, 칼 아이컨, 데이비드 아인혼 그리고 빌 애크먼 같은 거물급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세계적인 기업들을 쥐락펴락했다. 아이컨은 단 두건의 트윗을 통해 세계에게 가장 비싼 기업 애플의 시가총액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놀랄만한 성공스토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영향력이 정점을 지났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현실은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더 이상 미국 기업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대기업들은 새롭게 등장한 권력자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고 있다. 그들은 대기업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가 움직이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이들은 대형 기관투자자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자산운용사들이다.

대주주로서 자산 운용사들의 영향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기관 투자자들은 집단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모든 대기업의 주식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에 속한 30개 기업 가운데 29개는 기관 지분이 50% 이상이다. 월마트만 예외다. 그리고 지분 보유는 일부 대기업에 많이 집중돼 있다.

듀폰이 전형적인 사례다. 대리전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에 1359개 기관들이 듀폰의 지분 68%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세개 기관들이 17%, 다른 15개 기관들이 35%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집중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운용 중인 자산 총액은 지난 10년간 거의 네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보유지분 확대만으로 대형 기관들이 유명한 행동주의 투자자의 위상을 뛰어넘는 건 역부족이다.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기관들도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블랙록과 뱅가드의 최고경영자들은 미국 주식시장인 S&P 500 기업들에 ‘새로운 게임 규칙’을 담은 서한을 띄웠다.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는 “경영진이 분명한 장기 비전, 전략 방향, 그리고 신뢰 할만한 성과 평가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주주들의 이익이 효과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블랙록이 4조7000억달러를 운용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느 이사회나 최고경영자도 이 같은 메시지를 무시할 순 없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인가? 이미 수십년 전에 대형 기관들은 개인 투자자를 뛰어 넘는 대기업의 대주주가 됐다. 그리고 그 동안 그 영향력을 행사한 적도 거의 없다. 그러나 자산 운용 시장이 두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을 적기로 보고 있다.

인덱스 투자가 유행이다. 개인투자자, 연금 펀드, 기부금 펀드, 그리고 기타 투자자들이 인덱스 펀드가 행동주의 펀드보다 더 유리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인덱싱 또는 패시브 매니지먼트로 불리는 인덱스 투자 전문 자산 운용사들(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최대 규모다)은 지난 10년간 다른 자산 운용사들보다 성장속도가 두배나 더 빨랐다.

인덱스 운용사들은 투자 기업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근까지 보여준 일종의 업계 관행이었다. 하지만 행동주의 운용사들이 싫어하는 주식을 매도할 때, 인덱스 운용사들은 매도할 수 없었다. 그 주식이 인덱스(예를 들어, S&P 500 기업)에 포함돼 있다면 계속 보유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덱스 운용사들이 수익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바로 투자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빌 맥냅 뱅가드 최고경영자는 최근 기업 이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덱스 운용사로서 우리는 평생 주주다. 이것이 우리가 훌륭한 기업지배구조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정확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인덱스 운용사들이 새로운 행동주의 투자자가 된 것이다.

군주처럼 행동하는 최고경영자들의 시대는 끝났다. 최고경영자의 권한은 1992년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대형 기관들의 규모와 커지고 있는 발언권으로 최고경영자 권한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대형 기관들은 기업 경영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수천개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이사회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최고경영자들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많은 최고경영자들이 가족경영체제가 대세였던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대주주를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 글 :  하제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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