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제조업체 A사와 거래하던 대기업은 A사와 재계약할 때 제품 설계도면을 요구했다. 사후관리를 위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A사는 고민에 빠졌다. 설계도면을 만드는 비용 문제가 아니었다. 제품의 기술평가액이 회사 매출의 8~1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거절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우려한 A사는 설계도면을 제공했다. 설계도면을 손에 넣은 대기업은 곧바로 A사의 납품단가를 인하했다. 결국 A사는 납품단가 인하로 아파트 한채값 정도의 손해를 보고 지난해 대기업과의 납품거래를 중단했다.

#중소제조업체 B사는 한 업체로부터 품질개선 의뢰를 받고 심혈을 기울여 자체개발한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만들었다. 의뢰업체도 제품을 직접 보고 상당한 원가절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만족하며, 제품 시연 동영상을 요구하고 추가 테스트도 진행했다. 하지만 이후 해당 업체로부터 납품 계약을 하자는 연락이 없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의뢰업체가 다른 협력업체에게 우리 회사의 핵심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생산하도록 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계약을 위해 기술을 개발한 수고는 모두 물거품이 됐다.

중소기업들이 원청업체들의 기술탈취에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술을 탈취당하면서 단가인하와 거래단절 등의 보복이 두려워 외부에 신고조차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소기업중앙회(회장 박성택)가 중소하도급업체(수급사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술탈취 실태 파악을 위한 심층조사’에서 이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원사업자가 하도급업체의 기술자료를 요구·유용하는 행위는 하도급 4대 불공정행위에 포함된다. 따라서 하도급업체에 발생한 피해 금액의 최대 3배까지 원사업자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최근에는 정액과징금도 도입됐다.
하지만 원사업자는 여전히 단가조정, 품질관리, 사후관리 등 다양한 명목으로 하도급업체에 기술자료를 요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자료 제공하면 단가인하로
중소기업들은 피해를 당하고도 피해사실 입증이 어렵고, 신고시 보복이 두려워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특히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기술자료를 요구한 후 납품단가를 인하한 사례가 많았다.
중소제조업체 C사는 원사업자에 기술자료를 제공하지 않아 결국 거래가 끊기는 불이익을 당했다.
원사업자는 재계약에 앞서 단가를 조정한다며 제품의 원가 절감 공정 관련 기술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C사는 영업비밀이라며 끝까지 자료를 주지 않았고, 단가가 낮아도 물량이 많아 꾸준히 거래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결국 매출 대비 약 10% 정도 손실이 나자 부당하다고 원사업자에 항의를 했고 이후 일방적인 거래중지 통보를 받았다.
익명을 요구한 중소기업 D사 대표는 원사업자에게 기술자료를 넘긴 후 많은 단가인하가 이뤄졌다고 토로했다. 원사업자는 인하된 단가를 이전 계약 기간에 소급 적용해 돈을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D사는 원사업자와 거래를 이어가기위해 수억의 손해를 감수하며 돈을 환급해줄 수밖에 없었다.

중국업체에 기술자료 유출도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기술자료를 다른 협력업체로 유출시키고, 거래를 중단하기도 했다.
E사는 원사업자 요청으로 여러 기술자료를 제공했다. 현재 원사업자는 E사 제품과 매우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자체 공급하고 있다.
F사도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 F사 대표는 “원사업자가 제품관리 때문에 필요하다며 생산현장을 둘러보자고 해서 보여줬더니 우리 현장을 몰래 동영상으로 촬영해 중국 업체에 넘겨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다른 하도급 불공정행위와 마찬가지로 기술자료를 요구받은 수급사업자 대부분은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원사업자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고 거절할 경우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수급사업자인 중소기업들이 불이익을 당하고도 대부분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기술탈취 조항이 신설된 2010년 이후 공정위로 신고 건수는 23건(2016년 11월 기준)에 불과하다. 이중 8건은 사실관계 확인이 어렵거나 기술자료에 해당되지 않아 사건이 종결처리됐다.
중기중앙회 조사도 기술자료를 요구 받은 경험이 있는 117개 수급사업자를 대상으로 실시했지만 심층조사에 응한 업체는 단  9곳에 불과했다. 응답한 9곳도 자세한 설명을 거부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의 ‘2016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최근 3년간 기술탈취·유출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그 건수를 조사했더니 58건으로 조사됐다.  중소기업 1곳 당 평균 1.12건의 기술탈취·유출 경험이 있는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 수준에 대해 응답업체의 35.5%가 ‘취약’‘위험’이라고 답했다. 상당수의 중소기업이 기술유출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위, 적극적 직권조사 필요”
조사에 응답한 수급사업자들은 “기술탈취 행위 신고는 아무리 조심해도 익명성을 보장받기 어렵고, 신고하더라도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며 “기술탈취 근절을 위해서는 위법행위에 대해서 강력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경만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기술탈취는 중소수급사업자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중대한 법 위반행위임에도 신고가 적어 사건처리 실적이 저조했다”며 “기술탈취 만큼은 공정위가 직권조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고, 위반행위를 적발하면 최고 수준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고발 조치하는 등 무관용을 원칙의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해 수급사업자의 기술을 함부로 요구하면 안 된다는 신호를 분명하게 줘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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