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가 기아차 통상임금 1심 재판에서 ‘신의성실 원칙’을 배제하고 임금 소급 지급을 선고하자, 기아차와 마찬가지로 현재 통상임금 소송을 겪고 있는 100여개 기업들의 근심이 커졌다.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란 개념이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만큼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운에 맡기고 판결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통상임금 소송 제기 줄 이을 듯
최근 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실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올해 6월 말까지 통상임금 소송을 겪은 100인 이상 사업장은 전국 192개에 이르고, 이 가운데 115개는 여전히 소송 중이다.
192개 기업을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73개)이 가장 많았고 운수업(47개)과 공공기관(45개) 등이 뒤를 이었다.
현재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 중인 기업은 서울메트로, 기업은행, 현대모비스,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제철, LS산전, 쌍용자동차, 강원랜드, 현대로템, STX조선해양, 현대위아, ㈜효성, 두산엔진, 두산중공업, 한화테크윈, 현대차, 현대미포조선, 한국항공우주산업 등이다. 주요 대기업·공공기업들이 대거 포함됐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종업원 450명 이상’의 중견·대기업만 따져도 현재 35곳이 99건(평균 2.8건)의 통상임금 소송전을 치르고 있다.
소송 진행 단계별로는 1심 계류(48건·46.6%)가 가장 많았고, 이어 2심(항소심) 계류(31건·30.1%), 3심(상고심) 계류(20건·19.4%) 순이었다. 기업들은 패소 시 추가 비용부담액이 8조3673억원에 달할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전체 인건비의 무려 36%에 해당하는 돈이다.
통상임금 소송의 최대 쟁점으로는 ‘소급지급 관련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 인정 여부’(65.7%) ‘상여금 및 기타 수당의 고정성 충족 여부’(28.6%)가 꼽혔다.

“최저임금 이은 2차 임금 쇼크”
잇따른 인건비 상승 이슈로 기업 경영에 비상등이 켜졌다. 내년부터 최저임금이 16% 오르는데 이어 통상임금까지 늘어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은 2013년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될 수 있다”는 대법원 첫 판결을 토대로 통상임금 범위 확대에 따른 기업의 노동비용 증가액(과거 3년+향후 1년)이 최대 21조9000억원(고정상여금·기타수당 포함)에 달할 것으로 계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통상임금 논란이 본격화된 2013년 신의칙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될 경우 기업의 추가 비용부담은 최대 38조5509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일시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소급분 24조8000억원과 퇴직급여 충당금 4조8846억원 이외에 매년 8조8000억원의 비용부담이 더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연간 경제성장률이 0.13%포인트 하락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통상임금 범위 확대에 따른 근로자 보수의 증가는 연간 경제성장률을 0.13%포인트 하락시킨다. 지난해 한국의 경제성장률(2.8%)을 기준으로 하면 국내총생산(GDP)은 2조262억원 감소한다.

자동차 업계 위기 불 보듯
실제로 통상임금 패소 파장은 산업계 전체를 뒤흔들 만큼 크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특히 안팎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국내 자동차 업계는 침통에 빠졌다.
안근배 무역협회 무역정책지원본부장은 “비록 법원이 노조 측 주장 중 일부를 인정했지만 최근 통상임금 적용을 둘러싸고 115개사 이상 기업이 소송에 휘말려 있는 시점에 이번 판결이 산업계에 미칠 파장은 심각하다”며 “특히 국내 수출의 13.4%, 고용의 11.8%를 담당하는 자동차산업의 위기는 국가 경제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동차 산업의 우려는 실제 통계로도 확인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까지 한국 자동차의 내수·수출·생산은 2년 연속 감소했다.
올해 상반기 국산 차 수출량(132만1390대)은 2009년(93만8837대) 이후 8년래 최저 수준이다. 특히 중국 시장 판매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의 여파로 1년 전보다 40% 이상 급감했다. 같은 기간 내수 판매도 4% 줄어 증가세가 3년 만에 꺾였다.
이에 따라 상반기 자동차 부품 수출 역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 줄었고, 공장가동률은 2014년 96.5%에서 올해 상반기 93.2%로 떨어졌다. 완성차 5개사 중 현대·기아차와 한국지엠은 아직 임금·단체협약 교섭을 매듭짓지 못했다.
현재 법원에는 기아차를 비롯해 르노삼성을 제외한 완성차 4개사 관련 통상임금 소송이 걸려있다. 부품업체의 경우도 현대모비스, 만도 등이 소송을 진행하는 등 통상임금 리스크가 다수 남아 있어 향후 소송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상급심서 노사 상생하는 판결해야”
국내 완성차 5개사를 대변하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지난달 31일 입장문을 내고 “그간의 통상임금에 대한 노사 합의와 사회적 관례, 정부의 행정지침, 그리고 기아차와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막대한 부정적 영향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결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협회는 “지금도 경쟁국보다 과다한 인건비로 경쟁력이 뒤처진 상황에서 통상임금 판결에 따른 추가적인 막대한 임금 부담은 회사의 현재와 미래 경쟁력에 치명타를 줄 것”이라며 “국내 생산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기아차의 통상임금 조건과 경영 위기가 다른 완성차업체 및 협력업체로도 전이돼 자동차 산업의 위기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270여개 자동차부품 업체들을 대표하는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도 이날 별도의 입장문에서 “법원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위기와 중소 부품업체에 미칠 악영향을 도외시한 판결을 내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조합은 “이번 판결로 인해 기아차 영업이익이 3분기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커져 협력부품업체 대금결제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면서 “기아차에 대금지급 의존도가 높은 1차 협력 부품업체들은 자금회수에 지장이 발생해 유동성 위기 상황이 초래될 위험성이 있고, 이는 곧바로 영세 2차 협력업체로 전파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통상임금 소송은 결국 기아차의 경영난을 가중시켜 마지막엔 근로자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고, 그 사이 5000여개 부품업체 중 존폐를 다투는 회사들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며 “상급심에서는 노사 양측이 협력적 상생을 이어갈 수 있도록 현명한 판결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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