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저지와(井底之蛙), 즉 ‘우물 안의 개구리’는 결코 세상의 거대함을 꿈꾸지 못한다. 한번도 우물 바깥을 보지 못했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동전만한 크기로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스스로 만족할 뿐이다. 작은 개울에 사는 물고기나 새장 안의 새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람도 다를 바 없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이 어딘지에 따라 생각하는 법이 달라진다. 좁은 곳에 갇혀서 환경만 탓하며 자신의 능력에 제약을 둔다면 더 큰 꿈을 이루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핑계를 찾게 된다.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노력이다. 그래서 남 탓, 사회 탓, 환경 탓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황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을 바꾸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의 거처가 좁다고 원망한다면, 그 해결책은 스스로 노력해서 뛰어올라야 한다. 누군가 우물을 허물어주기를 기다린다면 평생 그 우물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장자>를 보면, 황하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알았던 황하의 신 ‘하백(河)’이 바다의 장대함을 보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을 본 바다의 신 ‘약(若)’은 이렇게 충고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우물이라는 공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만 살다 죽는 곤충에게는 얼음을 알려줄 수 없다. 시간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어설픈 전문가에게는 진정한 도의 세계를 말해줄 수 없다. 자신의 지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의 한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어렵다. 우물 안 개구리는 그곳에 만족하며 안주하기 마련이고, 여름만 사는 곤충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물이 얼음이 되는 겨울까지 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동물도 자신이 알고 있는 본능적인 지식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한계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활동하는 무대, 주어진 시간, 그리고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이다.

하지만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은 이러한 모든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감한 도전을 통해 주어진 환경의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상황을 읽는 통찰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 지식과 경륜을 갈고 닦아 남들이 가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나라 시인 왕지환은 자신의 시 ‘등관작루’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천리 밖까지 바라보고자 다시 한층 더 누각을 오르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관작루는 중국의 사대누각의 하나로 황하를 내려다볼 수 있는 풍광 좋은 곳이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더 멀리까지 즐기려면 더 높은 누각으로 올라가야 한다.

시는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만 시인이 가슴 속에 묻어뒀던 뜻은 따로 있었다. 모함을 받아 천하를 떠도는 신세지만 눈앞의 어려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호연지기를 시 속에 담았다. 더 높은 이상을 이루기 위해 한층 더 누각을 올랐던 시인의 의기, 새해를 맞아 새겨볼 만하다.

- 조윤제《천년의 내공》 저자
- 일러스트레이션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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