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

소비재 벗어나 건설인프라 산업으로 무한변신

로봇 앞세워‘새로운 100년’날갯짓

기업, 즉 회사는 생물체와 같다는 비유가 있다. 이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내외 환경에 맞춰 자신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강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변화와 혁신에 맞춰 기업의 모습을 바꾸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는 체질개선에 일가견이 있는 기업이 있다. 어떤 때에는 라이트급 선수였다가, 어느 시기에는 헤비급 선수로 변신을 하는데에 주저가 없는 곳이다. 바로 두산그룹이다. 

두산이라고 하면 과거에 OB맥주로 아주 유명했던 소비재 중심의 기업이었다. 이것도 90년대까지만 기억되는 두산이라고 할만큼 예전의 모습일 뿐이다. 지금은 맥주와 같은 말랑말랑한 소비재 상품은 취급하지 않고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등 중공업 중심의 기업으로 변신을 이뤄냈다. 즉 다루는 비즈니스가 거대하고 사이즈가 큰 중후장대형 비즈니스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다시 잡은 지가 오래다.

 

123년 역사 지닌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그룹은 정말 오래된 기업이다. 창립연도가 1896년이다. 123년이나 된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 기네스북에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기업으로 인정서를 받을 정도라고 하니, 그 업력의 대단함을 세계가 인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사이 무려 4세대 가업승계를 이뤄내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사실 너무 작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서울 종로4가에 면포를 취급하는 ‘박승직 상점’이 그 출발이었고 국내 최초의 근대 화장품인 ‘박가분’을 제조해서 판매를 한다. 박승직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이 두산상회를 설립하게 된다. 1952년 일본의 소화기린맥주를 인수하면서 동양맥주(현 OB맥주)를 설립하게 된다. 어엿한 맥주사업체로 성장을 한 것이다.

이어서 박용곤 3대 회장이 가업을 계승해 1990년대까지 패션, 프랜차이즈, 출판사업 등 소비재 중심의 기업으로 발돋움을 하게 된다. 그러다 1991년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로 대구지역 수돗물이 오염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두산그룹은 소비자 불매운동이 가속화되면서 창사 이래 최대 경영위기가 발생 하게 되는데, 결국 이 여파로 부도 직전까지 내몰리며 1996년 사업의 구조조정까지 시작하게 된 것이다.

두산은 정말 위기라서 변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100년 기업답게 확실한 변신을 추진하기에 다다른다. 네슬레, 코카콜라, 3M, KFC, 버거킹 등 계열사 지분을 잇따라 매각하게 된다. 이때 기업의 핵심사업인 OB맥주 벨기에 인터브루에 매각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전대미문의 한국경제 개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두산그룹은 한국경제의 대규모 불황 이전에 구조조정을 했기에 외환위기를 정말 운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외환위기때 M&A로 새판짜기

뼈를 깎는 체질개선 이후 기회는 아이러니하게도 IMF 외환위기로 발생한 대규모 기업 M&A시장에서 찾게 됐다. 한국에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불황속에서 자신들의 알짜기업들을 하나둘 매물로 내보내는 와중이었다. 특히나 대우그룹에서 나온 각종 기업체들도 있었다. 두산그룹 입장에서는 체질개선을 선제적으로 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계열사는 비싸게 팔고 IMF 이후 비교적 저렴하게 한국의 기업을 사들일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두산그룹은 사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쌓아올린 현금을 토대로 새로운 판을 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체질개선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이다. 당시 그는 두산그룹의 구조조정 실장으로 있었다. 주된 핵심 사업인 OB맥주를 대신할 신사업을 결정할 때 원칙이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매출이 조 단위 이상의 좋은 사업이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고, 두 번째는 글로벌 시장이 존재하는 사업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내수 중심의 기업에서 세계시장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래비전형 제조업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달한 방향성이 바로 ‘ISB’ 즉, 인프라 지원사업이었다. 전 세계의 ISB 시장의 규모는 연간 수천조원에 달하는 분야였다고 한다. 일반 소비자가 아닌 기업을 상대로 하는 B2B사업으로의 전환을 단행한 것이다. 소비재에서 건설 인프라 사업이라는 분야로 하루 아침에 체질을 개선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두산그룹은 어떻게 손쉽게 변화와 혁신으로 전진해 갔을까?

박용만 전 회장은 실용적인 CEO로 불리는데, 과감한 M&A는 회사를 사는 게 아니라 사람과 기술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제 우리가 사람을 뽑아서 교육하고 그 기술을 따라잡고 외국의 인허가를 받고 경쟁우위를 갖는다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간파했다. 차라리 속전속결로 M&A를 통한 사업의 새판 짜기를 하자는 게 그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잇따른 회사매각으로 자본금이 여유가 있었던 것도 든든한 무기였을 것이다.

더욱이 2000년이 되면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따른 매물로 각종 공기업이 M&A 시장에 나오게 되는데 그때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이 등장한다. 2001년 한국중공업 인수 후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을 해 4년 만에 인수한 비용을 회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 인프라 관련 기업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OB맥주의 신화에서 중공업 신화로 새 역사의 장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밥캣 인수 평가 놓고 설왕설래

이제 확실히 두산중공업은 변신에 성공한 기업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정말 매출이나 영업이익면에서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논란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2007년 당시 역대 최고가인 4조5000억원으로 미국 밥캣의 건설중장비 부문을 인수했던 것이다. 이걸 보고 재계에서는 두산그룹이 드디어 글로벌 기업까지 집어삼키며 세계시장을 호령하기 시작한다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밥캣 인수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은 1997년 IMF외환위기 시절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당시에는 경제위기를 사전에 방지할 체질개선이 있었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체질개선을 위한 과감한 베팅 중에 맞이하게 된 것이다. 금융위기는 직접적으로 세계 건설경기를 위축시키게 된다. 

요즘 뉴스에 자주 회자되는 금호아시아나도 2006년 대우건설을 인수한 이후 2008년 금융위기를 못 넘기고 위태위태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2008년 무렵은 세계시장을 노리던 국내 기업들에게 정말 아찔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재 밥캣의 실적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있다고 해도, 성공적인 수많은 다른 M&A 중에 밥캣 인수는 초창기에는 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와중에 4세 경영 시대를 연 박정원 회장은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6년 취임 이후 두산 밥캣을 상장시키는 등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 2년 연속 영업이익 1조원을 달성하며 진척을 보이기도 했는데, 안타깝게 영업이익이 늘어난 만큼 빚도 늘어 두산건설은 2018년 부채비율이 552%까지 치솟았다.

두산건설 때문에 두산그룹이 어렵다는 건 시장에서도 분석하는 일반적인 이야기다. 그렇다고 현재 두산건설을 제값을 주고 팔 수 있는 시장환경도 아니다. 그런데 박정원 회장은 두산건설 회장까지 겸직하며 애정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박 회장은 현재 사업구조 개편으로 새로운 기회를 모색 중이다. 그것은 스마트 디지털기업으로 변신 중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가장 많이 투자하는 계열사가 두산로보틱스라고 한다. 2015년 창립 후 전폭적인 지원으로 산업용 협동 로봇 양산에 성공했다고 하니, 두산그룹이 IT 분야에서 길을 모색하는 거 같다.

긍정적인 면은 1896년에 창업한 두산그룹이 10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정말 여러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도전에 도전을 거듭한 성공 DNA가 있다는 것이다. 화장품, 맥주, 김치, 중공업, 이제 로봇까지 시대가 바뀌면서 두산그룹은 변신의 귀재로 살아남았다. 어쩌면 그 변화의 원동력으로 두산그룹은 다음 100년을 준비해 나가지 않나 싶다.

 

- 김규민기업전문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