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동향]제록스가 HP를 원하는 이유

프린터와 복사기를 생산하는 제록스(Xerox)가 미국 PC·프린터 제조업체인 휴렛팩커드(HP)를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요즘 화제다.

제록스는 지난 4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HP 인수 안건을 논의했다. 제록스는 HP의 기업가치를 270억 달러로 평가했다. 제록스 시총은 HP30% 수준인 805000달러다. 제록스가 HP를 인수하면 몸값이 3배인 기업을 품는 셈이다.

제록스가 HP에 공식적으로 인수 제안을 할지, 이 제안이 성공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HP의 몸값이 제록스보다 3배 이상 큰 데다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고려하면 인수총액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책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록스는 인수자금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제록스는 일본 후지필름과의 합작회사(후지제록스) 지분을 모두 팔면서 23억 달러를 확보했다. 또 제록스는 최근 한 주요 은행에서 비공식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제록스는 일본 후지필름과 1962년 이후 57년간 유지해왔던 합작관계도 청산했다. 후지필름은 양사 합작사인 후지제록스의 제록스 보유 지분을 취득해 완전 자회사로 편입키로 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추진했던 미국 제록스 인수 작업 포기도 선언했다.

미국 코네티컷주 노워크에 본사를 둔 제록스는 대형 프린터·복사기를 생산하는 업체다. 연매출 100억 달러 중 대부분을 기업용 기기 대여 및 유지 사업을 통해 올리고 있어 매출 기반이 안정적이다. HPPC와 프린터 제조회사로 연매출은 제록스의 5~6배 수준인 580억 달러(2018 회계연도 기준)에 달한다.

미국 대표 기술 브랜드로 통하던 두 회사는 디지털 혁명으로 종이 문서가 감소하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들은 비용감축 노력을 펼치고 있으며, 회사 노조 또한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기회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프린터, 복사기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제록스나 HP 같은 기업들이 군살을 빼고 합병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제록스가 PC, 소형 프린터를 생산하는 HP를 인수·합병하면 총 2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쇠락해 가는 두 기술업체를 묶어 내는 대담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제록스는 주로 대형 프린터와 복사기를 제조하며 기기 대여 및 관리 서비스로 연간 10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제록스는 비용감축 노력이 성과를 내 올해 들어 주가가 84% 가량 급등했다.

HP1939년 빌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차고에서 창업한 실리콘밸리 1호 기업이다. 2017년에는 105000만달러(12000억원)에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를 인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HPPC, 프린터 등을 판매해 매출액 580억 달러를 올렸다. 하지만 프린터, 잉크 등의 판매량이 줄어들며 올해 들어 주가가 10%가량 떨어졌다. HP3년간 전체 직원의 16%를 감원하기로 하는 등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제록스는 전통이 있는 기업이다. 그 뿌리는 1906년 설립된 소규모 인화지 제조업체 핼로이드(Haloid Company)에서 시작된다. 핼로이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급속히 성장했다. 군대가 정찰사진을 사용하면서 인화지 수요량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인화지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핼로이드 사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1945년 핼로이드 사 창업자의 손자였던 조셉 윌슨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핼로이드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당시 연구개발 부서장 존 데소어는 바텔 연구소가 연구 중이던 칼슨의 전기사진술에 대한 자료를 발견해 제출했다. 윌슨은 기초단계에 불과한 그 기술이 매우 큰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946년 할로이드는 바텔 연구소에 매년 연구비 25000 달러를 지급하고, 장차 전기사진술로 인해 생기는 수입의 8%를 내놓겠다는 조건으로 칼슨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사들였다. 할로이드는 전기사진이라는 단어 대신 새로운 이미지나 관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1948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고전언어 전공 교수들에게 자문받아 그리스어 단어인 ‘xeros(건조한)’‘graphein(문서)’을 합해 건식문서라는 뜻의 제로그래피(xeropraphy)’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 후 핼로이드는 1947년부터 1960년까지 제로그래피 연구에 회사 영업수익의 2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사용했다. 10여년의 연구결과로 핼로이드는 오늘날과 같은 건식 복사기인 ‘914 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다. ‘914’라는 숫자는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9인치, 14인치까지 복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었다.

1959916일 드디어 최초의 현대식 복사기인 제록스 914 모델이 출시됐다. 사진의 사본을 코팅되지 않은 일반 용지에 복사하는 과정은 그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을 상업적으로 응용한 것은 제록스가 처음이었다.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제록스는 곧 복사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에 할로이드는 회사 이름을 할로이드 제록스로 바꾸었다가 1961년에 다시 제록스로 바꾸었다. 914 모델의 성공으로 1960년부터 1970년 사이 제록스 주가는 무려 66배가 뛰어오르며 거대글로벌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번 HP 인수로 제록스가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쓰는 계기가 될지 기대가 된다.

 

- 하제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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