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기술기업으로 ‘조선업 혁신’도전
‘스마트 팩토리’로 성장동력 급물살
지난 19일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했다.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직은 지난 2017년 말 최길선 회장 퇴임 이후 2년간 공석이었다. 원래 재계에서는 3세 경영자인 정기선 부사장이 차기 회장으로 오를 거라고 예상했다. 권오갑 회장을 두고 재계에서는 정기선 부사장의 경영승계를 물밑 지원하는 공신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었다. 이제 그 분석과 예상이 깨졌다.
이제 권오갑 회장이 직접 사령탑에 오르면서 현대중공업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출항한다. 경영승계라는 중차대한 전환점을 준비하던 현대중공업그룹이 정기선 부사장 대신 권 회장을 선장으로 앉혀 놓은 이유는 자명하다. 조선업계 불황과 대우조선해양 합병 등 난제를 해결할 리더십과 전문성이 절실하다.
그 시작은 지난 5월31일부터 시작됐다. 권오갑 한국조선해양 회장에게 이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현대중공업 물적분할, 즉 법인분할로 출범한 중간지주회사가 바로 한국조선해양이었고, 그 회사의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된 날이다. 한국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3개 조선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거기다 지금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 중이다.
한국의 조선업은 세계산업과 밀접하다. 한국조선해양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면 글로벌 시장 1위가 된다. 점유율이 21%에 달한다고 평가한다. 지난해 세계 조선소별 건조량 기준 현대중공업이 757만톤, 대우조선해양이 461만톤으로 합치면 건조량 1218만톤 규모다.
권오갑 회장은 세계 최대 조선기업의 컨트롤타워를 쥐게 되는 셈이다. 이건 한국의 조선업 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차대한 순간이다. 대우조선을 한국조선해양 자회사로의 편입이 완료되면 지배구조는 다음과 같다. 현대중공업지주→한국조선해양→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으로 이어지는 지배 체제가 구축된다. 매머드 조선사의 탄생이 임박했다.
원가 경쟁력 아닌, 기술력으로 승부
권오갑 회장은 한국조선해양의 대표직을 맡은 이후 보름도 안 된 지난 6월11일 회사 임직원 500여명에게 이메일을 발신했다. 그는 이메일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조선업을 노동집약적 산업이 아니라 기술 중심의 산업으로 전환해 나가겠습니다.” 권 부회장이 ‘기술’을 언급하며 체질 변화를 예고한 것은 이유가 있다. 지금 글로벌 조선업계는 생존을 건 혁신, 변화와 도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생존을 위해 우선 몸집부터 키우고 있다. 세계 조선업의 대형화 추세는 올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은 국유 조선사 2곳을 합병 추진 중이다. 중국은 국유기업을 관리하는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가 있다. 마치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를 주식회사라고 보면, 이 위원회는 미래전략실 같이 국유기업들의 재편과 전략을 강구하고 추진한다. 중국 1위 조선사는 중국선박중공업집단(CSSC)이고, 2위는 중국선박공업집단(CSIC)이다. 이 둘의 합병 구조조정안을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가 승인했다.
CSSC가 지난해 기준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 11.5%, CSIC가 7.5%인 점을 감안하면, 합병으로 중국은 전체 점유율 19%의 초대형 조선소를 확보하게 된다. 두 회사 모두 벌크선과 컨테이너선을 포함해 다양한 선종을 건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채로운 선박을 앞세워 전 세계의 바다를 호령하겠다는 야심이 담겼다. 중국 조선소가 합병을 통해 추구하는 바는 원가경쟁력이다. 한국은 다른 항로로 가야 한다. 그게 권 회장이 강조하는 기술력의 증진이다.
저렴한 인건비를 앞세운 조선 강국은 중국 말고도 너무 많다.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조선업 진출을 서두르는 자원 부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건비를 절감하는 걸로는 싸울 수 없다. 한국처럼 노동환경이 경직되고 인건비 부담이 큰 국가에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특단의 경영전략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권 회장은 앞으로 R&D에 투자를 집중하겠다고 임직원들에게 밝혔다. 그는 이메일에서 “경기 성남 판교신도시에 건립 예정인 글로벌 R&D센터에 5000여명의 인력이 근무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채용에 나설 것”이라며 “한국 조선업의 미래이자 핵심인 R&D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한국조선해양의 임직원이 500여명인 것을 감안하면, 5000여명의 연구개발자 양성 목표는 앞으로 한국조선해양이 제조기업에서 기술기업으로 뛰어넘겠다는 선언이다. 어느 기업도 불황기에 이렇게 과감한 R&D 전환을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한국조선해양은 대우조선해양을 품에 안아 몸집을 부풀리는 것과 함께 기술 중심의 기업이라는 두 개의 추진엔진을 장착하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업계 만큼 경기 불황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업종도 드물다. 그게 조선업의 한계이자 조선업의 기회이다. 경기가 호황이면 발주량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넘친다. 그 반대 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조선사가 있는 지역의 주변의 상권이 죽고, 부동산 가치마저 하락한다. 변덕이 심한 업황을 극복하는 것이 조선업계의 숙명이다.
권 회장은 한국조선해양의 숙명을 두고 이메일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친환경 선박과 스마트십 미래형 선박 수주를 통해 고용을 유지하고 한국 조선업 생태계를 지키는 게 한국조선해양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숙명도 내비쳤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일해왔습니다. 한국조선해양의 성공, 더 나아가 한국 조선업의 재도약을 주어진 마지막 소임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5G기반 조선해양 스마트통신 추진
권오갑 회장에게 현대중공업그룹은 운명 같은 곳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이라는 회사가 막 걷기 시작하는 유아기 때부터 함께 시작해 글로벌 시장 1위 조선사에 오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한 경영자다. 그리고 그는 정주영 창업주와도 일했고 전문경영인으로서 현대중공업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고, 위기의 조선업계를 부흥해야 하는 업계 최고참 자리를 이어받고 있다. 그는 1978년 현대중공업 플랜트영업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러니 40년 만에 사실상 그룹 1인자 자리에 올라 섰다. 한국경제에서 또 한 번의 ‘샐러리맨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권 회장은 40년 동안 그룹의 곳곳을 누비며 경험과 실력을 쌓아 올렸다. 입사 이후 런던지사, 현대중공업스포츠 사장, 서울사무소장을 거쳐 2010년 현대오일뱅크 초대 사장을 지냈고 2014년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및 그룹 기획실장을 역임했다. 지난 2018년부터는 현대중공업지주 대표이사 부회장 등을 맡아왔다.
그에게는 여러 상징적인 성과들이 있다. 그 가운데 현대오일뱅크 사장 시절 과감한 신규투자와 조직문화 혁신을 바탕으로 영업이익 1300억원대의 회사를 1조원대 규모로 성장시켰던 것도 대표적이다. 2014년에는 어려움에 처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로 취임해 과감한 의사결정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사업재편과 자산매각 등 개혁조치를 단행, 정상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그룹의 비 조선 사업에 대해서도 독자경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현대건설기계, 현대일렉트릭, 현대로보틱스, 현대에너지솔루션 등이 그 계열사들이다. 특히 현대중공업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일등공신도 권 회장이다. 그가 지난 2016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던 이유도 이렇게 그룹의 변화와 혁신과 도전을 성공적으로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부터 R&D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계1위 한국 조선산업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술과 품질 경쟁력 제고에 모든 걸 쏟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경기 판교에 그룹의 미래 기술경쟁력을 책임질 GRC(Global R&D Center) 설립을 추진하는 것도 그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기술중심의 조선사로의 상징적인 행보가 지난 7일 열었던 ‘5G 기반 사업협력 성과 발표회’ 자리다. KT와 현대중공업그룹이 5G 이동통신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팩토리 고도화에 나서는 것이다. 통신업체인 KT가 과연 제조 베이스의 조선사랑 어떤 궁합을 보일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의외로 5G는 현대중공업그룹의 혁신 원동력이 된다.
클라우드 기반 로봇 관리시스템은 현대중공업그룹 로봇 관리 시스템인 HRMS를 KT 클라우드에 구현한 시스템으로 별도 하드웨어를 구축하지 않아도 관리시스템을 관제할 수 있다. AI 음성인식 협동로봇은 현대중공업그룹 협동로봇에 KT 기가지니 인사이드를 접목해 작업자 음성만으로 로봇 동작을 제어하고 작업을 지원한다. 내년 4월 적용한다고 한다. 특히 KT는 한국조선해양과 네트워크 품질 최적화, 산업 안전, 원가 절감, 생산성 향상 등을 위한 5G 기반 조선해양 스마트통신 플랫폼을 개발할 계획이다. 이것만 봐도, 기술중심의 한국조선해양을 선언한 권오갑 회장의 선언이 공염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확실히 한국조선해양은 스마트 조선사로 나아가기 위한 닻을 올렸다.
- 차병선 기업전문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