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껌으로 터 닦고 평생숙원 제2롯데월드 매듭 후 영면
드라마 같은 ‘기업가 정신’후세가 주목
지난 19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그는 한국 유통산업의 거인(巨人)으로 불렸다. 청년시절 일본에 혈혈단신 넘어가 맨손으로 껌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롯데그룹은 고속성장해 국내 재계순위 5위에 올라선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는 한국재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 명예회장과 함께 한국경제의 신화를 창조했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구인회 LG그룹 회장, 최종현 SK그룹 회장 등의 창업 1세대들이 모두 영면에 들어가면서 이제 그들의 기업가 정신만 남게 됐다.
롯데그룹 역사의 발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지난 1965년부터 한국시장에서 롯데그룹의 신화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 44세였던 신격호 명예회장은 작은 가방을 직접 들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이미 그는 일본에서 제과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CEO였다. 일본 정부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아 귀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성공 아이템은 풍선껌이었다. 1948년 일본에서 종업원 10명과 함께 설립한 롯데의 첫 제품은 껌이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은 당시만 해도 서구 문물에 대한 반감이 컸다. 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경제도 배고픈 시절을 보내던 어려운 시기였다. 당장 밥을 먹는 문제도 어려운데 껌 같은 기호식품이 성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신 명예회장은 그러한 비판적 시각을 넘고 롯데 풍선껌을 히트작으로 만든다. 당시 브랜드명은 ‘롯데 그린껌’이었다.
이후 롯데는 일본에서 승승장구한다. 껌에 이어 초콜릿, 캔디, 빙과로 점차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된다. 롯데는 어엿한 일본을 대표하는 식품 기업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때 벌어들인 자금을 바탕으로 롯데는 1959년 상사 사업을, 1961년에는 부동산 사업을, 1968년에는 물산 사업을 확대하며 급성장하게 된다. 1965년 김포공항에 입국하던 신격호 명예회장은 롯데가 한창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직전에 한국시장에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진출을 한 것이다. 신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기업보국(企業報國)’이었다. 기업보국은 기업의 존재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산 활동을 통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고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리고 1967년 사실상 유통사업이라는 거 자체가 없던 한국시장에서 신 명예회장은 롯데제과를 세운다. 이로써 현재의 한국과 일본의 양대 롯데그룹의 첫 단추가 시작된 것이다.
왜 하필 그는 유통업을 선택했을까? 전해지는 바로는 신 명예회장은 경제구조가 잘 갖춰지지 않은 불모지에서 유통업이 활성화 된다면 다른 산업 전반에 걸쳐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을 촉발할 수 있지 않나 판단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 명예회장은 한국 진출 전부터 유통사업의 핵심 주축으로 백화점, 면세점, 호텔 등의 사업을 구상했다고 한다.
당시 재계 선두 대기업들인 삼성, 현대, LG(당시 금성) 등은 제조업 중심의 사업에 전력했다. 하지만 롯데는 다른 길을 걸었다. 롯데그룹의 근간은 유통이었고, 그것이 지금 롯데그룹의 깊고 튼튼한 뿌리가 됐다. 그룹의 확장성을 따진다면, 제조업이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유통사업의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 전통산업이 성장하던 시절에 호텔이나 요식사업이 대기업들에게는 찬밥 신세의 사업영역이었다. 롯데는 유통업이 제조 수출 못지 않은 중요한 사업이라고 확신했다.
유통공룡에서 종합 제조사로
롯데그룹은 유통을 기반으로 제과, 호텔, 식품으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단숨에 ‘유통공룡’의 지위를 확보한다. 특히 신 명예회장은 관광업에 관심을 뒀다. 그 이유는 관광업이야말로 많은 자원과 인력이 투입되지 않아도 외화를 벌을 수 있는 애국사업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17일은 명동에 롯데쇼핑센터, 지금의 롯데백화점이 처음 개관하던 날이었다. 이날 서울시민 30만명이 몰렸다고 한다. 당시에 수도권 인구만 800만명이었으니,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는 거다. 과연 이러한 집객이 가능했나 반문할 수도 있지만, 당시 현대식 백화점은 롯데가 최초였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100일 만에 입장객 수 1000만명 기록한다. 이후 롯데의 주력 사업인 유통업과 관광업은 2000년 한류 바람을 등에 타고 초고속 성장을 하게 된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또 다른 사업영역에도 뛰어들었다. 1979년 공기업이었던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했다. 지금의 롯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인 중화학 사업을 마련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롯데의 성장이 유통사업에서 기반 했다기 보다는 화학사업 때문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단 신 명예회장은 화학을 전공했다. 기본적인 산업의 지식이 충만했다. 그리고 화학산업이 당시 한국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선 중화학공업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자신이 사업을 시작한 전쟁 후 일본경제가 고속성장하는 과정에서 철강, 석유화학이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에 더했다.
롯데케미칼은 롯데그룹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핵심 축이다. 신 명예회장은 석유화학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86년에는 자신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기도 했다. 더욱이 신 명예회장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한국에서 첫 번째 회사로 당시 호남석유화학에서 시작하도록 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롯데케미칼도 승승장구 중이다.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롯데그룹 전체 순이익의 50%가 롯데케미칼을 비롯한 화학 부문에서 나올 정도다. 롯데케미칼은 시가총액만 7조원대다. 매출액은 2018년 기준 16조5450억원, 영업이익은 1조9686억원이다. 세계 종합화학 시장에서 이 정도 규모라면 대략 20위권이다. 롯데를 단순 껌과 과자로 성장했다고 판단하면 안되는 부분이다. 롯데가 종합화학 사업에 있어 성공을 할 수 있던 뿌리도 신 명예회장의 판단 때문이었다.
제2롯데월드타워까지 완성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평생의 숙원사업이 있다. 롯데월드타워다. 1989년 7월12일 잠실에 롯데월드를 개관하면서 그 사업은 계속 확장한다. 서울에 가장 높은 초고층 건물을 짓겠다는 신 명예회장의 의지는 1988년부터 ‘제2롯데월드 사업’으로 본격화됐다. 이 프로젝트는 정말 수십 차례 백지화됐지만 신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2011년 최종 승인을 받아 2017년 완공됐다.
신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었던 롯데월드타워 건설 허가와 관련 특혜 논란을 시작으로 롯데그룹이 검찰의 전방위 수사가 시작되고 며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 사이의 경영권 분쟁도 일어나는 등 약간의 잡음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평생 숙원과제인 제2롯데월드타워를 완성시켰다. 껌 사업부터 초고층 빌딩까지 신격호 명예회장이 한평생 펼친 사업들은 드라마틱하면서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 차병선 기업전문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