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성호(어성호글쓰기연구소 대표)
어성호(어성호글쓰기연구소 대표)

바위는 침묵을 품고 폭포는 소리를 품는다.’

어느 분야든 어느 임계점 넘은 사람들 공통점이 그렇다. 마주 앉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듬직함이 느껴진다. 바위덩어리 같은데 무얼 말하는지 어렴풋 짐작한다. 그 사람 이룩한 일을 익히 알기에 그렇다. 굳이 많은 말을 않는데도 이따금 내뱉는 한마디 울림이 크다. 공명의 소리가 세다. 잔잔한 듯 세차게 부딪는다. 신산한 노고를 단 몇 마디에 응축했기에 그렇다. 그런 사람을 일러 우리는 리더라 부른다.

리더가 리더다울 때 사람들은 더욱 그를 찾는다. 리더의 침묵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리더가 전하는 소리를 더 가멸차게 느끼려 하기 때문이다. 리더의 울림이 웅숭깊을수록 그 이야기는 더욱 깊어지고 리더가 가진 노고가 클수록 그 이야기는 더욱 반향이 거세진다. 리더의 메시지에 우리가 다가가는 이유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즐거웠습니다. 한국가요에 미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가요사를 집대성한 재일교포 박찬호. 그가 쓴 <한국 가요사 1, 2> 책을 처음 만났던 기억이 새롭다. 노래 부르는 가수가 많고 노랫말 쓰는 작사가가 많고 노래 평하는 평론가가 많아도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 바다 건너 일본 땅 어느 이름 없는 리더가 그 일을 일궜다. 1894년부터 1980년에 이르는 우리나라 가요 백년사를 정리한 진정한 리더가 박찬호 선생이다. 낙차 큰 그의 인생 이야기가 곁들여져 <한국 가요사 1, 2>는 나에게 필독서이자 애장품으로 남았다.

한국 민중이 듣고 부른 노래 역사를 책으로 한번 엮어 볼까?’

197816. 일본 나고야에서 도쿄로 가는 신칸센 열차 안. 서른넷. 나이 젊은 청년이 머금은 한순간 생각이 나머지 인생을 온통 가요사 정리에 매진하게 이끌었다. 단순한 정리 수준에 머물렀다면 그를 리더라 부르기에 객쩍다. 당시 국내에서도 구하기 힘든 음반과 가사집은 물론 관련 문헌과 사진들을 어렵사리 수집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가요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는 일본인을 찾아가 공들여 인수하기까지 했다. 민요와 창극에서 가곡과 오페라는 물론 재즈, 트롯, , 포크,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 노래를 다루게 됐다. 여기에 노래를 만들고 불렀던 수많은 음악인들의 역사가 집대성됐다.

일본어로 <한국 가요사>1987년에 출간됐을 때 우연히 음악평론가 안동림씨가 읽게 된다. 그의 번역 도움으로 2009년에 <한국 가요사 1>이 출간됐다. ‘조센징이라는 말이 싫어 멀리한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해 <한국 가요사 2>는 아예 처음부터 한국어로 집필했다. 한국어 출간본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 출간함으로써 한국 가요사 정리에 바친 그의 40년 여정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이런 작업이 온전히 집필에만 몰두하도록 허락됐을 리 만무하다. 부인이 운영하는 야키니쿠 식당 장수원에서 낮에는 고기 불판을 닦았다. 식당 일을 마감하고 하루가 끝날 무렵이라야 자신이 써가야 할 작업물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암 수술을 받았으며 곡절 많은 삶은 어느덧 칠십 중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리더가 가진 노고를 낙차라 불러도 좋겠다. 다시 말해 리더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그 이야기 속에서 묘한 향내를 듣게 된다. 리더가 일하는 분야가 무엇이든 많은 사람들이 찾을 때에는 이유가 있다. 리더가 맡아 이룩한 일이 일정 궤도를 넘어섰을 때에는 무엇 하나 허투루 다져지지 않았기에 반전역설을 잉태하게 만든다. 삶의 어느 대목에서 리더가 품어온 반전과 역설을 글쓰기로 남긴다 함은 깊은 책임에서 오는 매듭으로 받아들여진다.

 

- 어성호(어성호글쓰기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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