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 유럽왕실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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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유럽왕실 홀리다
  • 이혜영 기자
  • 승인 2020.06.29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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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자기를 귀중하게 여긴 풍토는 일종의 전통으로 굳어져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유럽의 거의 모든 궁전,넓은 홀이나 거실 가리지 않고 꼭 탁자 위나 문 입구에 놓여 있는 것은 동양 자기들이다.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동양 도자기를 수집해 실내에 장식하는 것을 최고의 호사이자 자랑으로 여겼던 시기가 있었다. 중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는 시누아즈리(중국 취향)’ 바람이 유럽 전역에 불었고, ‘강건왕아우구스트 1세는 일본 도자기를 모방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였다.


유럽을 사로잡은 동방에서 온 경이로운 예술품

1600년 영국이 먼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자 네덜란드도 자극을 받아 통합 동인도회사를 출범시켰고, 그 효력은 금방 나타났다. 1602년 바로 그해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물품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호를 대서양에서 강탈해 상선에 실려 있던 동양의 귀한 물품들을 암스테르담에 가져갔다. 그 물품 가운데는 스물여덟 꾸러미의 청화백자 접시와 열네 꾸러미의 작은 사발들이 들어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본 그 그릇들은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둔탁하고 두터운 석기 아니면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마욜리카만을 사용하던 그들에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얇은 두께로 하얀 바탕에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려진 청화백자는 그 어느 보석보다도 값어치 있는 보물이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청화백자와 중국 그릇들을 경매에 붙였는데,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완전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경매야말로 유럽인들이 대규모의 중국 자기를 접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602년은 근대 유럽 도자사(陶瓷史)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피겨린의 등장은 유럽 왕실외교와 만찬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피겨린의 등장은 유럽 왕실외교와 만찬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2년 뒤인 1604년에도 포르투갈로 귀국하는 카타리나호를 가로챘다. 운 좋게 이 배도 역시 무려 16톤의 중국 청화백자를 싣고 있었다. 배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경매 시장이 열렸다. 이번에는 프랑스 왕 앙리4, 영국 왕 제임스 1세 등 유럽 왕실의 대리인들과 수많은 귀족들이 경매에 뛰어들었고 앞 다투어 도자기를 구매했다. 단 며칠 만에 그 많던 물품들이 모두 팔려나갔다. 중국 청화백자에 대한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바야흐로 중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중국 취향)’ 바람이 유럽 전역에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중국 도자기는 향신료 이상으로 이득을 남길 수 있는 무역의 주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첫 경매가 있었던 해로부터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동인도회사의 배들은 1년에 십만 점이 넘는 중국 자기를 네덜란드로 실어 날랐다. 이 숫자가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양이 아닐 수 없다.

동인도회사의 대활약으로 17세기 유럽은 차와 설탕과 향신료에 그랬던 것처럼, 왕실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백자 바탕에 청색이나 다채색 그림이 우아하게 그려져 있는 그릇에 서서히 중독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탐닉이었다. 동양자기를 귀중하게 여긴 풍토는 일종의 전통으로 굳어져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유럽의 거의 모든 궁전, 넓은 홀이나 거실 가리지 않고 꼭 탁자 위나 문 입구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동양 자기들이다. 이리하여 청화백자는 물론 채화백자의 우수성과 미학성에 매료된 유럽 왕실은 아시아로 눈을 돌려 어떻게 해야 이 노다지들을 차지할 수 있을지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럽의 실력자들이 동양 도자기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구도에 속속 뛰어든 것이다.

 

욕망이 낳은 유럽 최초의 자기, 마이센

동양 도자기에 눈을 뜬 유럽의 군주 가운데 아우구스트 1(August the Strong)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인 작센(Saxen)의 선제후(選帝侯)로 폴란드 왕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드레스덴을 파리나 비엔나처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열중했다. 특히 그는 일본 도자기 중에서도 아리타(有田) 지방의 카키에몬(枾右衛門)’ 양식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카키에몬계의 특징은 유백색 바탕에 좌우의 균형을 일부러 무너뜨리고, 붉은색, 금색 등 다양한 색채의 안료로 완성된 기물 위에 우레에’(上繪: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에 다시 그려 넣어 구운 무늬나 그림)를 한 것이다. 가키에몬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어 아우구스트 1세를 사로잡았고, 그는 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예 도자기를 전시해놓는 전시실을 마련할 궁전을 지었고, 또한 동양 자기와 같은 것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가 도자기를 만들려고 생각한 것은 미학적 취미 때문만은 아니었고, 재정이 바닥나서 이를 채울 방법이 매우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에게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ottger)라는 연금술사가 붙잡혀왔다. 뵈트거가 도자기를 만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아우구스트 1세는 성 안에 실험실을 만들고 본격적인 실험에 나선다. 당시 유럽은 중국 백색 도자기를 백색의 황금으로 부를 정도로 대접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이에 대한 아우구스트 1세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힘든 우여곡절을 거쳐 뵈트거는 1710년 작센과 체코의 보헤미아를 잇는 국경지대에서 고령토를 찾아내고 마침내 유럽 최초의 자기 제작에 성공한다. 마이센 알브레히 성에 자기 공장이 실제 세워진 것은 그해 66일로, 이것이 지금 마이센 도자기의 시작이다.

 

마이센 짝퉁에서 출발한 체코 체스키 도자기.
마이센 짝퉁에서 출발한 체코 체스키 도자기.

로코코 문화의 정점을 찍다

마이센 동양과 같은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그 비법은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1719년 비엔나에서 유럽 두 번째 자기를 제조했고, 1726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뢰르스트란드(Rorstrand) 회사가 유럽에서 세 번째의 자기를 만들었다. 또한 마이센 근처에는 모방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 때는 짝퉁 공장의 수가 무려 60여 개에 달할 정도였고, 그 중의 하나였던 카를 타이헤르트(Carl Teichert)가 오늘날 체코에서 가장 유명한 체스키 도자기 회사(Cesky Porcelan)’가 되었다.

마이센 도자기가 유행하면서 유럽 왕실 외교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자기가 최고의 선물로 부상한 것이다. 최초의 마이센 도자기 선물은 1713년부터 1714년까지 아우구스트 1세가 그의 친척인 하노버의 선제후 왕비이자, 팔라티네이트(지금의 하이델베르크) 선제 후 프리드리히 5세의 딸인 소피에게 보낸 것이다. 광적인 도자기 수집가이자 감정가이기도 했던 소피는 죽을 때 수 백점의 도자기를 남겼다. 이 중에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마이센 찻잔과 받침 두 개 뿐인데, 이는 현재 런던 영국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독일지역 하노버 왕가의 유물이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바로 그녀가 영국 조지 1세의 어머니라서다.

이후 마이센 피겨린(작은 조각상)이 인기를 끌면서 이제는 피겨린이 왕실과 귀족, 수집광들의 표적이 되었다. 작슨의 아우구스트 3세는 1745년 프로이센 공주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제르프스트 즉 나중 예카테리나 여제와 러시아 황위 계승권자인 표토르 대제의 손자 홀슈타인 고토르프 공작 결혼선물로 마이센 도자기 세트와 함께 다량의 피겨린을 보냈다. 나중 예카테리나 여제는 마이센 도자기에 40개의 피겨린 작품을 특별 주문했는데, 그녀는 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39킬로미터 떨어진 푸시킨 시의 오라니엔바움 궁전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그녀는 또 애완견 리제타모양 피겨린의 특별제작을 주문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情婦)이자, 로코코 문화의 상징으로 유명한 마담 퐁파두르도 엥네(Ines)와 미미라는 자신의 두 애완견 피겨린 특별제작을 주문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담 퐁파두르는 오늘날 프랑스의 세계적인 세브르왕립도자기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동양의 차()도 세계사를 바꾸었지만, 차를 마시는 도자기 역시 세계사를 바꿨다. 이 짧은 지면에 그 생생한 역사를 다 담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 편집 중소기업뉴스 이혜영 기자
- 자료제공 : 한국메세나협회, 글 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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