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서정아트센터 이윤정 큐레이터
같은 곡을 여러 장소에서 들을 수 있고, 원하면 음반도 소유할 수 있는 음악과는 달리, 미술 작품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감상이 가능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유일성’ 때문에 미술 작품은 그 자체로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한 작품을 보기 위해 먼 거리에서 찾아와 작품을 눈에 담는 사람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 앞에 수많은 관람자가 모이는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이는 마치 지나간 사조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처럼 작품은 테크놀로지 문명의 빠른 변화와 함께 미디어아트로 전환되어 전시장 곳곳을 도배하기도 하고, 판화와 프린팅 기법으로 인한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여러 장소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산한 작품들은 유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우라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우라는 허상이 아니다
아우라는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자신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그는 아우라를 “예술작품이 지니는 고유한 본질 같은 것, 우리가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신비로운 체험”이라 정의한다.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다양한 매체가 등장함과 동시에 전시 형태도 바뀌었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하는 아우라의 개념은 고전 예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심오한 사상이나 예술적 아이디어, 더 나아가 종교적 가치까지 담고 있는 과거 예술과 달리 지금은 얼마든지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체의 발달과 아우라의 상관관계는 19세기에 발명된 카메라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진을 테크놀로지 영역을 벗어난 예술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 속에서 예술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유럽의 귀족들은 초상화를 사진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실제 인물보다 미화된 경향이 있었듯, 사진도 연초점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보이게 한다거나 음영 효과를 동원해 회화적 감성을 담아냈다.
이러한 이유로 사진은 자연스럽게 예술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예술은 신성해야한다’는 시각을 오랫동안 견지해온 당대의 이론가들이 보기에는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처리되는 이미지는 어딘가 예술답지 못했다.
그렇다면 간단하고 빠르게 생산한 예술은 아우라를 상실했다는 의미와 같은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작업이 모두 높이 평가되는 것이 아닌 만큼 그 경계는 구분하기가 모호하다.
#디지털화된 신성 영역
만일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이자 종교적인 제의가치의 유무”로 아우라를 정의내린 벤야민의 말에 의존한다면, 공을 들인 만큼 작품에 작가의 노고와 철학이 담긴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특히 종교적인 메시지가 강한 그림의 경우 더욱더 그렇다. 이러한 공식이 동시대까지 유지되고 있는지는 작년 런던 내서널 갤러리(London National Gallery)에서 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타계 500주년 기념 전시 <레오나르도: 걸작을 체험하라>를 둘러싼 학계의 반응을 살피며 알 수 있었다.
전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Virgin of the Rocks>를 미디어아트로 재현해 원화와 함께 비교하며 볼 수 있도록 했다. 디지털 아트로만 채운 전시장은 익히 보았어도, 원화를 디지털아트와 함께 전시한다는 발상은 다소 신박해 보인다.
고요한 분위기 안에서 침묵을 유지하며 감상해왔던 제단화가 현란한 빛으로 명암을 극대화한 미디어아트와 나란히 놓여있는 공간의 분위기는 직접 감상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기술’로 재탄생한 작품과 원화를 같은 선상에 둠으로써 그 둘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할 목적인지, 아니면 선명한 고화질 복원으로 인해 원화를 디테일하게 살피게 할 목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원화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져다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내 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조로운 감상보다는 체험에 방점을 둔 요즘의 동향을 보면 오감을 동원한 전시 기획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리적인 거리와는 무관하게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가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거리감은 작품에 대한 신성성을 더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으로 상실한 아우라를 채우는 과정
앞서 언급한 디지털 미디어와 유사한 맥락으로 디지털 프린팅,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은 처음부터 대량으로 복제하기 때문에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어도 희소성이 가져다주는 원본의 신비감을 채우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마릴린먼로 Marilyn Monroe>(1962)를 보았을 때, 관람객들은 유명 작품을 보았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 촬영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원화를 여러 장으로 복제한다고 해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방증한다.
팝아트 이후로는 복제된 작품을 한 번 더 전복하여 복제함으로써 패러디하는 차용기법이 생겨난다.
미국 작가 스터트반트(Elaine Frances Sturtevant, 1924-2014)는 196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이후의 시기까지 앤디 워홀(Andy Warhol),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제스퍼 존스(Jasper Johns) 등 미국의 유명 팝 아트 작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차용하여 복제와 복제를 거듭하는 방식으로 당시 미국 미술계 내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1960년대 기점으로 다채롭게 변화한 미술 생산은 그 방식 안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아우라를 붕괴했지만, 그러한 행위 자체가 예술로 인정받은 지금 역설적이게도 작품의 아우라는 다른 방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판화에서도 ‘단 하나’를 찾는 사람들
“에디션 몇 개까지 있어요?”, “되도록 앞에 번호 주세요.” 판화를 계약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는 요청이다.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라는 가치를 유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에 부여된 숫자와 한정된 수량이 지닌 의미는 여전히 중요한 부분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전에는 에디션 판화를 마지막으로 찍고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C.P(Cancellation Proof)”를 새기기도 했다. 이는 무한으로 생산하지 않고 특정한 수에 한해서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예술품에 유일성을 부여하는 행위다.
관람자들은 턱없이 높은 금액의 원화를 살 수 없어 대체재로서 판화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원화에 버금가는 만족도를 얻고싶어 하기에 연필로 작게 새겨진 서명과 에디션 넘버가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원본이 존재함으로써 판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 자체도 예술로 인정받고 충분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팝아트 이후로도 복제와 대량생산에 대한 담론이 생겨났듯, 미술 작품에 대한 가치는 유동적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