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업 GQ양복점 대표

양복은 특별하다. 특별한 날에 입고,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 힘주어 꺼내 입는다. 셔츠와 넥타이를 고르고, 구두까지 맞춰 신으면 어떤 갑옷보다 든든해지는 옷 한 벌. 남성들에게 구김 없이 내 몸에 딱 맞는 양복 한 벌은 자신감이자 당당함의 원천이 된다.

무려 56년 7개월,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핸드메이드 양복을 지어온 GQ(지큐)양복점 김진업 대표는 양복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손님이든 세심하게 치수를 재고 옷을 재단하고 가봉하여 딱 맞는 인생 양복을 선보인다. 안감 안에는 큼지막하게 ‘GQ양복점’이 새겨져있다. 양복명장으로서의 자신감이고, 고객에게 최고의 제품을 선사한다는 서명이기도 하다.

왕십리 터줏대감으로 이곳에서만 자신의 양복점을 이어온 김진업 대표. 2호선 상왕십리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지금의 지큐양복점은 3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켰다. 문을 열면 고급스러운 원단이 켜켜이 정돈되어 있고, 마네킹에는 그의 손바느질로 이어진 근사한 양복이 걸려있다. 누군가의 어깨는 넓고, 누군가의 등은 조금 굽고, 누군가의 허리는 가늘다. 제각각의 사이즈를 지닌 양복 사이로 근사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김진업 대표가 모습을 드러낸다.

“옷을 잘 입어야 당당하고 자부심이 생기거든요. 단순히 옷 한 벌이 아니라 그 자세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기성복이 시장의 95%를 점하는 환경에서도 그의 고급 손바느질은 멈추지 않는다. 기성복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신사의 품격이 오늘도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의 힘. 양복의 격을 높이다

56년 동안 수제 양복을 만들어오셨습니다. 양복 짓는 일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제가 1947년생인데 그때만 해도 기술 하나만 제대로 배우면 최고라고 했어요. 시계나 라디오 기술을 배우려고 탐색을 해보니까 주로 수리가 많았어요. 쓰던 물건을 수리하는 기술에는 매력을 못 느꼈죠. 그러던 1964년 봄, 명동 번화가에서 고급 수제양복 만드는 친척 형님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습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일하는 게 멋져 보였죠. 그때부터 수제 양복을 배워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GQ양복점’이라는 대표님만의 양복점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1977년도에 ‘20세기 양복점’이란 상호로 처음으로 내 가게를 열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곧 20세기가 지나가겠더라고요. 그래서 1984년 남성잡지에서 영감을 얻어 ‘GQ양복점’으로 개칭을 했습니다. 왕십리에서만 쭉 가게를 이어왔어요. 처음 창업할 때는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비교적 싼 셔츠원단 등으로 구색을 맞춰 오픈한 기억이 나네요.

하나의 길을 꾸준히 걸어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오래도록 양복점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좋은 양복을 만드는 데만 노력하느라 딴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매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잘해야지’라고 마음먹다보니 어느새 노력이 취미가 되었죠. 맨 처음 입문했을 때는 바늘 쥐는 동작을 배우는 데만 한 달이 걸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세요? 엄지와 검지로 하도 바늘을 쥐었더니 엄지손가락 끝이 힘을 받는 바깥쪽으로 휘었어요. 한눈 팔 시간 없이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 게 장수의 비결이겠죠.

수제 맞춤 양복을 만들 때 가장 신경 쓰고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무엇인가요?

맞춤 양복이기 때문에 고객이 첫 눈에 만족하도록 만드는 데 가장 신경을 씁니다. 제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고객이 별로라고 여기면 안 되거든요. 고객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고객 맞춤에 가장 신경 씁니다. 옷 자체는 오래입어도 변함없이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겉감 안에 들어가는 심의 면 전체를 촘촘하게 떠주는 속바느질 작업에 공을 들이는 이유입니다. 옷을 만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해줘야 옷이 변형되지 않고 옷 모양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때문이죠.

양복명장으로서 선생님만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수제 맞춤 양복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요?

섬세한 성격이 중요해요. 세심한 손바느질 작업이 계속해서 반복되거든요. 다행이 저는 꼼꼼하고 완벽주의 성격도 있어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만든 제 옷을 입으면 옷이 겉돌지 않고 착 감긴다는 평을 많이 들어요. 다른 옷이 많아도 제가 만든 옷에만 손이 간다고 하죠. 테일러로서 꼭 필요한 자질은 끈기와 집념이라고 생각해요. 고객이 만족할 양복을 꼭 만들고 말겠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거죠. 참고로 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마라톤을 시작해 42.195km 풀코스를 20여 차례 완주했어요. ‘맞춤양복은 명품이다’라는 깃발을 들고도 달리고, 65세 때도 달렸죠. 힘든 시기가 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는 의지가 체화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맞춰 옷을 짓는 과정이 쉽지 않을 텐데요. 맞춤 양복을 짓는 일의 가장 어려운 점은 무인가요?

맞춤양복은 인체의 굴곡을 따라 선을 조합하여 만들기 때문에 고객의 신체 치수를 정교하게 재야합니다. 그런데 종종 손님이 몸에 힘을 주거나 원래 체형과 다른 자세를 유지할 때 치수를 재기가 난감하죠. 미묘하지만 평소 체형을 반영하지 못하면 옷이 뜨게 되거든요. 매일 반복해온 옷 짓는 일은 이제 어렵지도 않아요. 제 역량을 벗어나 치수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상황이 때로는 힘들지요.

그동안 많은 고객들과 인연을 맺었을 텐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무려 14년 동안이나 꾸준히 찾아준 고객이 있어요. 6개월마다 가봉을 하고, 매월 양복 1벌을 맞췄죠. 무척 섬세한 고객이라 0.2mm까지도 체크를 했습니다. 저도 즐거운 작업이었지요. 한 손님은 소공동과 강남 지역을 돌아보고 유행을 파악한 후 양복을 맞추러 오셨어요. 그 세심함이 굉장히 인상적인 손님이었죠.

기성복 브랜드가 다양하게 생겨나면서 맞춤양복이 많이 위축되었는데요. 이를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수제 맞춤양복을 알리고 경험하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일단 접해 봐야 좋은 걸 알기 때문에 일단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한 번만 입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고객 유치를 했지요. 기성복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 제 옷을 입으면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거든요. 그렇게 제 맞춤양복을 한번이라도 입어본 손님들이 낸 입소문을 듣고 새롭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상당수에요.

한국양복명장이자 (사)한국맞춤양복협회 회장으로 활동하시며 수제 맞춤양복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제 맞춤양복의 우월함을 잘 모르는 게 안타까웠어요. 이를 알리는 계기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전국 규모의 기능경진대회를 열어 테일러에게 ‘마스터 테일러’ 인증서를 수여하는 기회를 만들었죠. 자부심을 가지고 더 좋은 옷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어요. 강사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청년수제맞춤복기술교육 강사로 참여해 맞춤양복의 섬세함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역사회 주부 대상 손바느질 교육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전문가 교육은 아니지만 직접 손바느질을 배우며 맞춤 양복이 얼마나 공이 드는 옷인지를 체감할 수 있거든요. 협회 회장으로 재직 시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기술자문과 소품협찬, 회원들의 엑스트라 출연 등을 추진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지켜온 경영 철학은 기술과 품질 그리고 자부심입니다. 앞으로도 당당하게 정통 맞춤양복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습니다. 고급 맞춤양복을 짓는 테일러는 고급 전문 직종입니다. 현재 고급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이 은퇴를 앞두고 있는 만큼 젊은이들이 도전하기 유망한 직종입니다.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 선정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는데 대를 이어야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후계자를 양성해 저는 떠나도 왕십리 GQ양복점은 대대로 이어지는 꿈을 꿔봅니다. 양복명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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