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그녀는 얼마나 미모였기에 대당(大唐)제국의 황제 현종(玄宗)을 미치게 했는가. 당대의 시성(詩聖) 백거이(白居易) 즉 백락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의 미모를 읊고는 있으나 모두가 형용사일 뿐 구체성이 없다. 예컨대 ‘한번 웃으면 백가지 교태가 쏟아지고…’하는 식이다.
양귀비는 너무나 유명해서 사실(史實)과 픽션이 얽혀져 어디가 사실이고 픽션인지 어렵게 되었다. 전기(傳記)소설 등에서 미모에 관해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살결이 희고 부드럽고 몸매가 풍만하고 요염하다는 것.
신구당서(新舊唐書)는 정사(正史)다. 여기에 기록된 그녀의 미모도 이 범위에서 별로 상세한 것이 없다. 그녀의 태생이 촉(蜀:四川省)이라 중원(中原)지역에 비해 얼굴의 생김이 서국형(西國型)이라해서 특히 매력적이었다.
양귀비는 성격이 명랑한데다가 음악과 춤을 좋아했고 촉 지역의 춤은 일품이었다. 이른바 육체적 매력이 넘치는 글래머형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 AD 719년생으로 어릴때 의부(義父)따라 長安으로 이주, 735년 17세에 현종 황제의 황자 수왕(壽王)의 비(妃)가 됐다.
740년 양옥환이 22세때 현종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고 현종은 그녀를 여승으로 만들어 절(寺)에 보내고 이름을 태진(太眞)으로 개명하고 태진궁(太眞宮)을 지어 태진을 ‘태진궁’으로 불러 들였다. 이때 현종은 60세였고 양옥환은 22세였다. 5년이 지나 745년에 후궁의 벼슬중 가장 높은 귀비(貴妃)가 됐다.
현종이 양옥환을 절의 여승으로 보낸것은 배우자가 자기 아들인 수왕이고 자기의 며느리를 빼앗아 자기 후궁(後宮)으로 삼으려니 그녀의 심신(心身)을 정화하고 새로 태어나는 여인을 만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현종은 그녀를 ‘貴妃’로 세우면서 그녀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지고 그녀의 일족에게는 높은 벼슬이 주어졌는데 그후 그녀의 가까운 집안사람 양국충(楊國忠)의 출세는 빨라져 어느새 재상이 됐다.
약 10년동안 현종은 온천궁으로 세워진 화청궁에서 양귀비와 천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태평의 꿈이 이어갔다.
그러나 그간에 어양(漁陽:北京)의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이 양귀비의 양자가 되고, 양국충이 재상이 되자 두사람간에 갈등이 생기더니 755년 11월에 안록산이 20만 대군을 앞세워 장안을 향해 반란(反亂)을 일으켜 9년간을 끄는 사이에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756년에 안록산이 낙양을 점령하자 장안에 있는 현종은 황족과 함께 촉(蜀)으로 피난길을 떠났으나 장안에서 50㎞ 지점인 마외(馬嵬)라는 시골역에서 황제 호송군의 반란으로 楊씨 일족은 몰상당하고 양귀비를 요구하는 반군의 성화에 못이겨 환관에게 명해 절의 법당 앞에 목졸라 죽이라 해서 양귀비는 목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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