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둘 눈발이 흩날리더니만 이내 솜덩이처럼 눈이 굵어졌다. 하얀 나비처럼 너풀너풀 날갯짓을 하다가 이내 온 사위에 두터운 흰옷을 입힌다. 아무 곳에나 날개를 접는 곳이 내 자리다. 논과 밭, 나무, 지붕, 집 뒤켠의 장독대 위까지 살포시 내려앉으면서 이불의 두께를 높여 간다. 밤새 사락사락 소리 없이 내린 눈은 날이 밝아지면서 신천지를 만들어 낸다. 눈이 부셔 똑바로 눈을 뜰 수 없다. 반쯤 열린 눈 사이로 설국이 비집고 들어와 친한 척 한다. 무거운 듯 바람 한줌에 의지해 눈을 떨쳐버리려고 몸을 부르르 떠는 나무들 사이로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이 윙윙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순백의 설국(雪國)으로 떠나요~”
겨울철이면 흔하게 보았던 눈이 귀하디귀하게 되었다. 어릴 적, 시도 때도 없이 흩날리던 눈. 마당에 눈이라도 덮이면 호랑이처럼 무서운 아버지의 마당 쓸라는 소리. 너무나 귀찮기만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겨울다운 겨울이 기다려진다. 손과 볼을 꽁꽁 얼어붙게 하는 강추위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가로등 불빛에 하얗게 쏟아져 내리던 눈이 그립다. 눈물이 나도록. 눈 기다리다 눈병이 날 지경이다. 두어 해전부터는 지구는 심한 독감에 걸린 듯 눈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방구석에 틀어 박혀 체지방에 불을 대로 불은 몸을 지탱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고 있던 즈음 눈 소식을 접한다.
대관령 일원이 폭설로 교통대란을 겪고 있단다. 워낙 다설 지역인 대관령이라서 한번쯤은 심할 정도로 많은 눈을 내려준다. 현장의 눈 속에 파묻힌 사람들은 악조건의 기상에 발을 동동 구를 테지만 나에겐 희소식이다. 그곳에 설경이 아름다운 선자령(1,157m, 강원 평창 도암면, 강릉 성산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관령의 강릉과 평창의 경계에 있는 선자령은 눈과 바람, 그리고 탁 트인 조망이라는 겨울 산행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우선 등산용품에 가서 겨울 장비를 준비한다. 직업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책임감 강한 성격은 어쩔 수 없다. 멋진 설경을 찍어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다. 평소에 눈여겨 봐둔 것들을 하나둘 꼽아서 준비한다. 아이젠은 물론이고 눈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스패츠, 거기에 복면처럼 얼굴을 뒤집어 쓸 수 있는 것까지. 이 정도면 눈구덩이에 굴러도 살아날 것 같다.
가는 동안에도 걱정이다. 횡계읍내에서 선자령 등산로 입구까지 차량 이동이 원활할까 하는 생각에서다. 여차하면 택시라도 이용할 생각이다. 정작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 수많은 생각들이 ‘기우’였음을 알게 된다. 사람 사는 곳은 자연 재해도 그다지 두렵지 않다는 것. 고속도로는 신속한 제설작업이 한창이고 선자령 등산로 입구인 대관령 휴게소까지 가는 길도 어렵지 않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운 설원이 펼쳐진다. 소나무 몇 기 툭툭 올라와 있는 풍경들 위에도 눈으로 한껏 치장을 했다.
이제 유명무실화 돼 버린 휴게소. 대관령은 해발 고도 832m의 백두대간 고원마을. 그 위상은 아직도 남아 있다. 빈 건물 주변을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대며 윙윙 소리 내고 있다. 하나둘씩 산행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들에게 아이젠 매는법을 배우고 장비를 챙겨 발길을 옮긴다. 예상보다 많은 등산객들. 난 혼자지만 그들이 있어서 고된 산행길이 기쁨이 된다. 기상대로 오르는 찻길이 나 있지만 차량 통행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 무릎까지 차오른 눈 둔덕 사이로 등산로가 잘 나있다. 먼저 간 사람들이 만들어낸 발자국이 내심 고맙기만 하다. 허허로운 산 능선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어린 전나무다. 그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일일이 바람막이를 해 두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울창한 전나무 숲 군락지가 될 것이다.
산길은 아내 찻길과 합류되고 한참으로 올라서니 대관령 기상관측소 건물과 철탑이 앞을 가로 막는다. 서쪽으로는 눈에 뒤덮인 산세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아름답다. 풍치도 잠시 그 앞에 선자령 이정표에 눈길이 간다. 아래부터 계산해보니 정상까지는 딱 5km다. 거리상으로는 무리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완만한 능선길인데다 주변을 살펴봐도 연세가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완전 중무장을 해서 인지 몸 한구석도 시린 곳이 없다.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에 내 발을 들이밀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선다. 눈이 많아서 움푹 파인 발자국도 만난다.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고 다시 한번 커다란 철탑과 맞닥트린다. 새봉이다. 이곳에서는 대관령 옛길 도로는 물론이고 강릉, 더 멀리로는 바다도 조망할 수 있다. 아쉽지만 바다는 희뿌연 안개가 가리고 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돌린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트레킹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과 그래도 시작한 일이니 정상까지 정복해야 하지 않느냐는 두마음이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다.
결국 정상이 이겼다. 푹푹 발이 빠질 정도로 깊은 눈이 있는 나무숲을 지난다. 뒤따르는 등산객은 헉헉거리는 필자를 뒤로 하고 앞서간다. 이 추위에 반팔만 걸친 사람이 있어서 경이롭게 쳐다보았는데 그 뒤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사람과 맞닥트렸다. 옷을 껴입을수록 더 춥다는 그의 지론. 신기한 마음에 사진 한 컷 부탁했지만 잽싸게 도망치는 그를 가로 막을 수가 없다.
걷고 또 걷고 평평한 구릉을 만난다. 흰 설원에 한 줄로 이어지는 등산객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다. 이곳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을 돌린다. 이대로 포기하고 내려간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는 그저 걷는 수밖에는 없다. 헉헉거리며 내 뱉어낸 입김은 안경에 수증기를 만들고 자외선 차단 안경은 흰색 눈빛을 검은 빛으로 변하게 해 앞을 가로 막는다. ‘선자령’이라는 돌 팻말을 만났을 때 그곳은 여느 곳에서 보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밋밋한 풍광 그 자체였다. 남쪽으로는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서북쪽으로 오대산, 북쪽으로 황병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름답다는 그 자리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나무조차 없다. 황망하게 불어대는 바람과 모래바람처럼 흩날리는 눈 뿐. 정상을 기점으로 강릉 쪽으로 나가는 길이 있지만 대설로 인해 길은 끊어졌다. 대부분 원점으로 발길을 돌린다.
지칠대로 지친 발. 그래도 산행의 묘미는 잡념을 없앤다는 점이다.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저 걷고 걸을 뿐이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 것일 게다. 왕복 10km. 보편적으로 4시간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지만 지체하는 동안 6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한껏 흘린 땀방울은 차체하고 원 없이 본 설경에 엔돌핀이 송송 솟아나고 있다.
■대중 교통:선자령 산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하다. 단체 산악회를 따라가는 것이 편하다. 서울에서는 상봉이나 동서울터미널, 고속버스로 강릉으로 가거나, 서울 상봉터미널에서 강릉행 직행버스를 타고 횡계리까지 간 다음 이곳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노선버스를 타거나 횡계에서 택시를 이용한다.
■자가 운전:영동고속도로 횡계나들목. 삼거리에 읍내 쪽으로 우회전. 가다보면 초입 왼쪽에 양떼목장, 선자령 팻말이 있다. 옛 영동고속도로 따라 6km 정도 가면 휴게소. 대관령 관측소 돌 팻말 옆 산길을 이용하면 된다.
■별미집과 숙박
횡계는 황태덕장으로도 유명하다. 횡계읍내에는 황태요리를 파는 곳이 많다. 황태회관(033-335-5795)은 저렴하고 푸짐한 반찬 등으로 인기 있는 곳. 하지만 밑반찬은 푸짐하고 맛이 좋지만 정작 황태의 제 맛을 못내는 것이 아쉽다. 오삼불고기로는 납작식당(033-335-5477)이 인기 있다. 가스렌지 위에 구멍 송송 난 둥근 철판이 독특. 담백한 밑반찬과 야채가 곁들여지나 맛은 달짝지근하다. 숙박은 스키 철이라서 횡계는 복잡. 진부읍내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사진설명 : 길 마저 끊긴 선자령의 설경은 겨울 산행의 백미(白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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