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진포의 새해 일출을 보는 전날은 무던히도 추웠다. 찬바람이 밤새 바닷가 마을을 강타하는 날, 그래도 하늘엔 다행히 별 몇 개가 떠 있다. 별 뜨는 다음날은 으레 구름 안은 채 해돋이를 볼 수 있다. 실낱같은 희망에 선잠을 자고 화진포로 향한다. 특징 없는 바닷가. 어슴푸레 흰 파도가 밀려오는 구석 한 편. 미인의 눈썹이 생각나 처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초승달과 샛별이 아직 빛도 잃지 않은 채, 자그마한 동산 옆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두터운 검은 구름 탓에 해오름은 더디기만 하다.
해오름을 기다리지 못하고 바닷가를 배회하는 사람들. 해도 뜨기 전에 시야가 밝아지면서 환하게 바다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가을동화, 파이란, 태양은 없다 등 무수한 드라마, 영화촬영지다. 그중에서 문득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보았던 일출이 생각난다. 주인공들이 마지막 숨쉴 곳을 찾아 떠났던 그곳.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달 하나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모래사장에서 날 밤을 새고 일출을 보던 장면. 도심에는 이런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주인공들은 뇌까리지만 여전히 도시에서도 빨간 해는 떠오르고 있었다. 더 갈 곳이 없는 그들에게 비쳐진 일출은 지금의 나와 어떻게 다른 의미였을까?
산고가 길어질수록 희망이 사라진다. 언제부터인가? 화진포에서 초도항까지 해안길이 난 것이. 해안 길을 따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초도항 등대로 다가선다. 매서운 바람이 인다. 손가락은 금세 굽어서 카메라를 들 수도 없다. 방파제로 향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고개를 외로 빼고 바다를 쳐다본다. 정시간에서 한참이 비켜서서 구름 위가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한다. 바다와 구름층이 높아서 붉은 해는 볼 수 없다. 금세 모습을 드러내더니만 이내 색깔이 흐려진다. 일출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쳐댄다. 올해는 저 해처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난다.
많지는 않지만 자그마한 배들이 초도항으로 들어오고 있다. 새벽 3시에 바다에 나가 들어왔다는 부부는 드럼통에 나무 장작을 지피면서 추위를 녹이고 있다. 가슴까지 차오르게 입은 고무 옷에는 얼음이 얼었다. ‘산 입 풀칠’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을. 허구헌 날 이 작업은 계속 될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추위에 몸서리가 쳐지지만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견딜만하단다. 이런 삶속에서도 철저한 자기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조업이라도 많다면 추위가 문제겠는가? 그들은 인근하고 있는 대진항에 물고기를 경매하러 떠났다.
환하게 밝아진 빛을 이용해 화진포 주변을 더 돌아본다. 이제는 이승만, 김일성, 이기붕 별장도 볼 수 있다. 화진포 해양박물관(033-682-7300-2)도 생경하다. 넓디넓은 화진포 호수는 철새조차 없이 썰렁하다. 얼음이 얼지 않은 호수. 어찌된 영문일까? 그저 색 바랜 갈대밭 주변으로는 조깅 인파가 열 지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이른 아침의 바닷가는 늘 활기가 있다. 거진, 가진, 대진항을 차례로 돌면서 내내 부단히 살려고 노력하는 어부의 몸짓을 발견한다. 힘 좋은 방어지만 이미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를 어찌 면하리. 그물을 정리하고 물고기를 떼어내는 사람들에게 꽂힌 시선을 벗어 버리고 멀리 바다를 내다본다.
겨울 바다는 검푸르다. 바람이 칠 때마다 푸른 물빛엔 하얀 떡가루를 빚어낸다. 청랑한 하늘과 부서지지 않은 파도, 활처럼 휜 모래사장은 거품 인 흰 소금물로 씻겨 주고 있다. 파도에 씻기고, 닳아버린 흰 모래는 말이 없다. 밤바다 이정표를 만들던 등대의 불빛도 햇살에 사라졌다.
해가 높아지면서 최북단을 향해 달려간다. 모처럼 맑은 날, 통일전망대(033-682-0088,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를 들르기 위함이다. 우선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 생각보다 출입은 자유롭다. 주차비(3,000원), 입장료(2,000원)만 내고 건성으로 교육영화 한편 보고 나면 이내 출발이다. 바닷가 가는 곳마다 굵은 철망으로 엉켜 있어 시야를 가린다.
100개가 넘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전망대다. 부처상, 성모 마리아상, 교회가 함께 모여 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1년에 30일 정도만 맑은 날이라는 안내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동전 넣고 갈 수 없는 북한땅 관람에 여념이 없다. 10분이면 북한 땅과 연결된다는 그곳엔 철교가 복원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 지척이다. 전망대에서 눈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면 해금강이 불과 5km 떨어져 있고 일출봉을 비롯한 금강산의 신선대, 옥녀봉, 구선봉, 접선봉과 바다의 만물상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하지만 조국분단의 현실을 직접 볼 수 있는 비무장지대와 휴전선 철책이 우리네 현실을 알려주고 있다.
눈 시리게 아름다운 바다도 그림의 떡. 그런데도 늘상 볼 수 있는 바닷가지만 민통선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득 한해를 여는 1월의 최북단 여행. 몇날 며칠 정도는 겨울바다에 취해 일상이 자유로워질 것 같다.
■대중 교통 : 속초나 간성에서 각 방향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단 간성까지는 서울에서 이동차량이 많지 않은 점을 감안.
■자가 운전 : 양평, 홍천, 인제, 원통으로 난 46번 국도 이용. 용대삼거리에서 진부령을 넘으면 대대삼거리. 이곳을 기점으로 7번국도와 만난다. 화진포와 통일전망대는 왼쪽으로, 가진, 간성은 우측 속초방면으로 조금만 가면 된다.
■별미집과 숙박 : 어느 곳에서나 싱싱한 회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가진항에 있는 자매해녀횟집(033-681-1213)은 자연산 회와 물회가 수준급이다. 그 외 반암의 수성회집(033-682-5033)은 건물도 깨끗하고 길목이어서 사람들이 많다. 거진항의 논산횟집(033-682-2548)도 소문난 집이지만 특별난 것은 없다. 또 간성읍내의 부흥면옥(033-681-3292)은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숙박은 화진포콘도(033-682-0500), 명파리의 금강산콘도(033-680-7800)를 비롯하여 여럿 있다. 특히 최근에 간성읍 터미널 옆에 황실불가마(033-681-7767-9)가 들어섰는데 시설도 좋고 깨끗하다.
■이곳도 들러보세요 : 금강삼사와 건봉사
화진포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금강삼사는 이북의 표훈사, 신계사, 장안사 등 3곳의 부처를 모셔온 곳이다. 전쟁당시 피난 나온 부처를 모시면서 생긴 사찰이다. 나오는 길목에서 잠시 건봉사도 들러보자. 건봉산(911m, 고성군 거진면 냉천리)밑에 자리하고 있는 건봉사는 한때 설악산의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었다. 요새는 사명대사와 연계된 자료들이 조사되고 있으며 나날이 변모하고 있다. 그래도 부도밭이나 일주문의 기둥 등엔 여전히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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