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향이 그리워 떠난 남녘에도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간간히 내린 눈발과 추위로 인해 피어난 꽃들도 동사되어 까맣게 타들어가는 안타까움을 지켜보는 내 가슴속엔 시퍼런 멍이 들었다. 아주 잠시 찾아온 봄추위였지만 봄은 한참동안이나 애를 태웠다. 그래도 어느 하루,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봄 햇살을 지상에 내리 꽂았다. 갑자기 겨울옷이 무거워짐을 느낀 날, 섬진강변에 흐드러지게 매화꽃이 꽃망울을 터트리면서 아우성을 쳐대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일기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는가? 남녘에서 긴 방황을 했다. 봄이 가장 먼저 찾아든다는 섬진강변의 매화꽃을 보러 가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더 지체해야만 했다. 따사로운 햇살만 찾아든다면 금방이라도 아우성치면서 꽃망울을 터트릴 매화꽃. 이곳에서는 올해 3월12일부터 20일까지 축제가 열리고 있다. 지난 97년부터 지역 주민들의 동네축제로 시작된 매화축제가 올해로 아홉 번째. 무수한 홍보 덕분에 사람에 치이는 매화축제장이다.
매화꽃이 시작되니 묶은 때를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을 터. 햇살 따뜻한 봄날, 떠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겨울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이곳은 인산인해다. 축제장은 해마다 청매실농원을 기점으로 열리고 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한 치라도 부잡스러움을 벗어나고 싶어서 일찌감치 서둘러 떠난 섬진강변. 분명, 해사한 꽃밭 구경은 못할지라도 꽃 한 무더기라도 본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리.
광양 매화꽃 보러 가기 전날은 화엄사 입구에서 유숙했다.
이른 아침 화엄사로 향하고, 이왕 내친김에 구층암을 들러보고 연기암까지 오르기로 한다. 암자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비포장 길이 이어지고, 간간히 그늘에서는 눈길도 만난다. 3km가 넘는 거리. 소나무 울창한 숲길은 솔 향이 아침의 상쾌함과 뒤섞여 기분까지 좋게 만든다.

연기암 앞에 다다랐을 때 고로쇠를 채취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렇지. 이곳에서도 고로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지’. 광양의 백운산과 매화꽃밭을 연계하려는 계획을 바꾼다.
인적 하나 없는 연기암을 들러보고 나오는 길에 지프차 한 대를 만난다. 고로쇠를 채취하러 왔다는 이 지역 젊은이다.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를 타고 오른다. 굵은 돌이 많은 산길을 겁도 없이 잘도 오른다. 젊은이는 전날 과음을 했다고 하면서 고로쇠 물 한잔을 마시면서 건네준다.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물통엔 얼음이 얼었다. 물맛은 그동안 먹었던 것에 비해 훨씬 달다.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듯하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탓에 생산량이 무척 줄어들었단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물이 나지 않고, 날씨가 따뜻해도 안 된다는 젊은이의 설명이다. 밤에 온도가 많이 떨어지고, 낯은 따뜻해야 물이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일교차가 커야 한다는 뜻.
아버지 대부터 물을 받았다는 그는 귀신처럼 척척 나무를 찾아냈고 작은 파이프를 나무에 박고 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화엄사에 세금을 내고 봄 한철 수액을 받는다는 그. 그를 뒤로 하고 부산하게 섬진강으로 향한다.
길가엔 ‘여러분은 지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는 팻말을 발견하게 된다. 섬진강변 드라이브는 국내에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로. 그 글귀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하얀 모래사장과 훤하게 트인 강줄기에 눈이 부시다. 강한 봄 햇살에 실눈을 뜨면서 한없이 이어지는 강변길을 달린다. 아주 천천히. 아끼면서. 쌍계사지구 앞에 다리가 생겼다. 다리를 건너 광양 땅으로 발길을 옮긴다.
간간히 때 이르게 핀 매화꽃이 눈길을 잡는다. 아직 덜 핀 매화꽃들. 금세, 하루가 다르게 하얗게 꽃을 피워내고 향을 흩뿌릴 것이다. 꽃 속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꿀을 따 모으는 윙윙거리는 벌떼들, 길게 이어지는 섬진강변의 봄 햇살을 가슴에 담으니 한없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이해인수녀의 “강”이라는 시구를 읊조리면서.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입니다

청매실 농원은 고지대라서 꽃망울조차 터트리지 못했다. 그래도 축제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또 촬영이다. 조용히 축제장을 벗어나 느랭이골 고개를 넘어서 어치마을에 잠시 들러 다시 고로쇠 채취 사진을 찍었다. 물맛은 고지대에서 맛본 화엄사가 더 나은 듯하다. 그래도 아직 해가 질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 있다.

망덕포구를 향한다. 섬진강 줄기가 바닷물과 조우하는 곳이다. 배알도라는 자그마한 섬앞으로 띄엄띄엄 배들이 정박해 있다. 예전 광양제철소가 생기기 전에는 많은 부분이 바다였고 김 생산을 했다. 하동 김은 소문났다고 한다. 포구는 예전 명맥을 잇는 듯 횟집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벚꽃이 필 때 가장 맛이 좋다는 일명 ‘벚굴’을 팔고 있다. 망덕포구에 서니 강석오라는 사람이 노랫말이 쓰인 노래비가 있다.

내 고향 망덕포구 새 우는 마을
울고 웃던 그 시절이 하도 그리워
허둥지둥 봄바람에 찾아왔건만
님은 가고 강 언덕에 물새만 운다
내 고향 망덕포구 꽃 피는 마을
웃고 놀던 그 사람을 차마 못 잊어
허둥지둥 봄바람에 찾아왔건만
님은 가고 강 언덕에 동백꽃 핀다

포구를 벗어나 하동으로 돌아 나온다. 섬진강 하류를 기점으로 이어진 강변 드라이브 길은 한없이 아름다운 여정의 풍광을 만들어주고 있다. 머지않아 흐드러지게 피어날 매화꽃이 도로 옆에 화사하게 장식할 것이다. 인적 드문 산간지역에 아름다운 전경을 만들어 내는 어느 한해를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다.
한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에 여념이 없고 산능선이에도 무심하게 하얗게 봄꽃을 피워내던 날. 꿈을 꾸듯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해가 지고 있다. 강변을 붉게 물들이는 그곳에 옅은 춘정이 흘러내리고 있다.

■자가운전 : 무주-진주간 고속도로-단성나들목에서 하동 쪽으로 들어오거나 시천에서 청암을 거쳐 하동읍내로 들어와도 좋다. 호남고속도로 전주IC-전주, 남원방면 17번 국도-남원 19번 국도-구례읍. 화개에서 섬진강을 건너도 좋다.
■별미집과 ㅅ 숙박 : 광양시내에는 불고기집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은 3대광양불고기(061-762-9250). 집도 번듯해 깔끔하고 밑반찬도 맛있다. 강너머 하동에는 재첩국이 괜찮다. 여여식당(055-884-0080)은 추천할만하다. 숙박은 화개, 하동, 강변 등에 숙박할 곳이 여럿 있다. 백운산 휴양림(061-763-8615, 옥룡면 추산리)이나 광양시내에 있는 타워모텔(061-761-2410)은 러브장이지만 시설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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