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에 정동진이 있다면 남녘에는 정남진이 있다. 정남진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 곳이 장흥군이다. 지금도 지명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행에 있어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게다. 장흥 여행엔 특별한 목적을 부여하진 않았다. 해마다 봄이 되면 위백규 선생을 기리며 제를 올리는 장천재의 동백꽃을 떠올리지만, 남녘의 동백꽃이 딱히 볼거리가 있다고 칭하기도 애매하다. 가로수가 되어 버린 흔하디흔한 동백꽃을 빙자해 여행을 떠나기에는 다소 무리가 되는 곳이 장흥 땅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봄, 그곳엔 특별한 ‘정’이 흐르고 있다.
지난해 가을 장흥의 대표산인 천관산 억새 군락지를 찾았다. 산을 오르면서 사방팔방으로 막힘없이 트인 능선 전망에 감격했고 멀리 수문 바닷가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넓은 가슴이 돼 한껏 산을 품에 안았다. 아직 동백꽃이 피지 않을 장천재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아주 천천히 나만을 위한, 남들처럼 여유로운 여행을 흉내라도 낼 참이다.
너무 일러서 맛보지 못한 장흥 시내에 있는 한 음식점에 들러 식사를 하고 시인 곽재구가 ‘세상에 제일 맛있는 팥죽’이라고 극찬한 회진포구를 찾아볼 생각이다.
강진을 비껴서 장흥읍내로 찾아든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던 반찬을 떠올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백반 1인분을 감사한 마음을 시킨다. 백반은 어느 한정식에 뒤지지 않을 만큼 한상 가득이다.
구운 돼지고기에 푸짐한 쌈은 기본. 홍어, 생굴, 주꾸미, 대하, 낙지 등 해산물은 물론이고 반찬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많다. 인절미에 배추 뿌리, 그리고 구수한 된장찌개가 냄비에서 끓어가면서 스르르 장흥에 대한 정이 솟구친다.

동해에 정동진이 있다면 남녘에는 정남진
하룻밤을 보내고 일찍 바다로 나선다. 수문 옆 용곡마을 방파제 끝으로 나가서 일출을 볼 참이다. 바다에 키조개, 고막 등을 잡으러 간다는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을 피우고 있다.
‘해나 보시쇼’하는 어부의 말에 따라 일출을 바라본다. 남해는 해보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장흥에서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일출. 삶은 이렇듯 예측되지 않아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먼 바다 구름 낀 산 너머로 뾰죽 해가 오르더니만 이내 사위가 밝아진다. 어느새 주변엔 수많은 배들이 둥둥 떠 있다. 멀리 보면 한편의 그림이지만 그들은 얼마나 많은 손놀림을 하고 있을는지…….
해가 뜨면서 여다지~장재도로 향한다. 동백꽃이 아니면 어떠리. 봄빛이 살아 있는 지금, 그곳을 잠시 바라보고, 느껴보고 싶을 뿐이다. 역시 장천재의 동백꽃은 때가 이르다. 머지않아 봉우리는 붉디붉은 입술을 열고 해맑게 웃을 것이다. 천천히 주변을 거닐면서 내려오다가 휴게소 앞에 발을 멈춘다.
말끔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깔끔한 할머니가 진하디 진한 칡차를 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부사서 캐낸 ‘진짜 칡’이라는 것을 강요하지 않아도 맛에는 쌉쓰름한 칡내음이 가득 차 있다. 여행은 이렇듯 소소한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리.
발길은 남포마을 소등섬을 향한다. 장흥에는 세 사람의 유명 문인이 있다. 한승원, 이청준, 송기숙님이다. 그 중에서 소등섬은 이청준님이 쓴 ‘축제’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정남진’이라는 돌 팻말을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바닷가 안쪽에 자그마한 섬이 하나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특히 일출 명소로 알려져 있다.
마을 집집마다 굴 구이를 파는 팻말이 걸려 있다. 아침이지만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흙으로 만든 독특한 화로가 서너 개 걸려 있고 그 위에 철판을 얹는다. 그리고 잘게 쪼갠 장작불을 지핀다. 주인어른은 열심히 굴을 구워준다.
이 소등섬은 정월 대보름날 당할머니 제사를 모시는데, 수백 년전 어떤 할머니가 마을 한 어르신의 꿈에 나타나 “소등섬에 내 제사를 지내주면 마을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 것이다”하시며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정성껏 당할머니의 제사를 지냈고 그런연유에서인지 아직까지 바다에 출어해 조난이나 사망한 사실이 오늘날까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얘기를 듣는 중에도 입안으로 열심히 굴 구이를 밀어 넣고 있다. 겨울 소일인 굴 구이가 끝나면 봄철부터는 고기를 잡는단다. 각종 물고기는 물론이고 가을이면 전어를 잡아서 생계는 충분하다고.

진한 팥국물처럼 따뜻한 ‘정’이 사르르~
서두르지 않고 회진포구에 닿는다. 회진포구는 예전에는 제법 비중 있는 항구였지만 지금은 발전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다. 오래 전에는 부산행 여객선이 오갔고 일제시대 때는 미곡이 실려 나갔다고 한다.
그 포구 앞, 허름한 조립식 건물에 팥죽집이 있다. 곽재구 시인이 극찬한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 속에 나온 연인이 있다. 너무나 조촐한 식당. 사진에 나온 장소에서 이사를 와서 이 정도로 번듯해(?)졌다는 것이다. 혼자여서 미안한 맘이지만 꼭 맛을 보고 싶다. 푸짐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팥죽 한 그릇. 박하지 게장, 노란 배추 물김치, 김치 등 세 가지 반찬이 곁들여진다. 소금 간을 했는지 죽은 적당히 간이 맞다.
진한 팥국물에 쫄깃한 면발. 정말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가격은 2천원. 팥죽을 먹고 나서도 금세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간간히 인근 주민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러 들어선다. 소주 한 병은 1천원. 뜨거운 된장국물이 안주의 전부. 참으로 싼 소주다. “큰 댓병 소주 사서 술병에 넣는 거야. 팥죽도 동네 할머니들한테는 1천원 받아. 예전 시집와서 논 서마지기 질 때보다 그래도 지금이 훨 나아” 두어 팀의 술손님이 들어서고 나서야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한승원님의 고향인 신상포구는 뒤로 하고 이청준님의 마을을 돌아보고 율포로 나오는 동안 가슴 한 편이 따뜻해 옴을 느낀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서도 따뜻한 ‘정’이 사르르 막힌 가슴을 녹여주고 있다.
■자가 운전 : 장흥읍에서 2번 국도로 강진 방면으로 조금 가면(길 왼쪽으로 장흥남초등학교를 지나친다) 감천교 바로 못 미쳐 왼편으로 관, 대덕으로 가는 23번 국도가 나온다. 23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 16.8km 가면 관산읍이다. 읍에서 장천재까지 5km 거리.
■별미집과 숙박 : 바지락회로 소문난 맛집은 바다하우스(061-862-1021)가 수문해수욕장가에 있다. 또 장흥읍내에 있는 명동가든(061-863-8797)은 소문난 쌈밥집. 일부러라도 찾아볼만한 곳이다. 또 자연산 회를 취급하는 싱싱횟집(061-863-8555)이 주민들에게 크게 소문난 곳이다. 숙박은 옥섬모텔(061-853-2420)이나 천관산자연휴양림(061-867-6974)을 이용하면 된다. 새로 생긴 옥섬워터파크(061-862-2100)는 풍광 좋은 바닷가 옆에 들어선 워터파크. 24시 찜질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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