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고생 마음 고생 했던 한국생활이 최대의 기회였습니다.”
외국인산업연수생으로 입국, 연수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다시 찾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회장 김용구)가 중소기업주간을 맞아 초청한 4개국 5명의 외국인연수생 출신 성공인사들은 이 같은 견해를 밝히고 “성실한 자세로 미래를 준비한다면 한국에서의 생활이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에 초청된 성공인사들은 해당국가의 노동부 및 송출기관에서 추천한 9개국 21명 중 서류심사 및 현지 확인조사를 거쳐 선발된 경우로 귀국 후 한국에서의 연수경험을 토대로 발전적 성과를 이룬 것이 특징. 처음에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를 이해 못했다고 밝히는 이들은 경영자가 된 지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빨리하라는 것이 단순히 일의 속도를 높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확하고 신속하게 일처리하라는 뜻으로 자신의 직원들에게도 '빨리빨리' 재촉한다고 털어놓았다. 1주일 동안 국내에 머문 이들은 과거 일했던 연수업체를 방문해 직장동료와 재회하고 외국인근로자 어울림 대잔치 등에 참석한 후 귀국하게 된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기협중앙회 황재목 과장은 “외국인력 활용에 대한 왜곡된 국민여론을 바로잡고 연수중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들의 성공스토리를 소개한다.

한국서 배운 안전의식, 중국 공장서 활용

류디안태(중국, 40세)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난 류디안태씨가 한국행을 결심한 것은 지난 2000년. 고등학교 졸업 후 시골 초등학교에서 12년 동안 계약직 교사로 근무한 류씨는 월평균 120위안(1만5천원)의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업연수생으로 고생할 각오를 했다. 충남 연기군 소재 한양사료에서 3년간 근무한 류씨는 2천4백만원(18만위안)의 목돈을 마련했고 귀국 후 철광석 가공공장 투자에 나섰다.
합작 설립한 이 공장의 공장장인 류씨는 한국에서 배운 안전제일 원칙을 자신의 공장에서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월요일이면 전체회의에서 안전에 대한 강의를 꾸준히 받았습니다. 중국공장 역시 안전관리가 가장 중요한 일로 한국에서의 간접 경험이 큰 도움이 된 셈입니다.”
급여 및 배당으로 년간 13만위안(1천700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류씨는 한국에 오기전 보다 90배에 달하는 경제적 성장과 중국인 연평균 수입의 10배가 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역동적인 한국생활 중 현장 동료들에게 심한 욕설을 듣는 순간 인간적인 모욕을 느꼈다는 류씨는 퇴근시간 이후에도 자신의 일을 완수하는 책임감과 빠르고 깔끔한 일처리를 중시하는 ‘빨리빨리’ 문화를 이젠 이해할 수 있다고 털어놓는다.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직장동료가 아닌 가족이라는 말은 느낌이 정말 따스했습니다. 이런 한국에서의 경험은 차곡차곡 모아진 목돈 못지않게 소중한 자산입니다.”
류디안태씨는 한국생활의 성공요인으로 성실성을 꼽고 한국에서 연수중인 외국인들에게 업체 변경하지 말고 한 곳에서 열심히 일할 것을 당부했다.
한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선호한다면 비용지출이 늘어 사업밑천 모으기가 어렵다는 것. 철저히 자기 통제적인 생활을 참아낸 류씨는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고된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고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땐 국제전화 한통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이렇게 보낸 3년 동안 42만원이었던 월급은 68만원으로 불었고 연수를 마칠 무렵 83만원까지 올라갔다. 한국에 오기 전 한화 1만5천원의 수입으로 어렵게 생활했던 것에 비하면 중국에서의 4년5개월치 월급을 한달만에 번 셈이다.

한국생활 통해 코리안드림 이뤄

쑨코노(인도네시아, 35세)

쑨코노씨는 인도네시아 판두(PANDU)에서 가구판매업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시장 길거리에서 생선을 팔며 생활하던 쑨코노씨는 한달 평균 30만루피아(3만3천원)의 수입으로 결혼한 아내와 부모님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쑨코노씨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 98년11월로 경남 양산에 있는 대한고분자에서 2년 동안의 고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언어문제로 애로사항을 많이 겪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돼 작업에 들어가서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정확한 작업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작업이 미숙했고 그 때마다 욕설을 얻어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소통 미숙으로 한국생활 초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쑨코노씨는 매월 55만원씩 받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2년 동안의 한국생활 중 1천200만원(1억1천만루피아)을 저축한 쑨코노씨는 2000년 11월 귀국 후 1천2백만루피아(110만원)를 투자해 식당을 구입했다.
쑨코노씨의 부인이 경영하는 이 식당은 연수기간 중 한국인 직장동료의 아이디어서 따온 것으로 연간 2천8백만루피아(320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4천만루피아를 투자해 가구 판매업도 시작한 쑨코노씨는 식당운영 및 가구 판매로 연간 5천3백만루피아를 벌고 있다.
360만루피아로 1년 생활을 했던 쑨코노씨는 한국에서의 성공적인 연수생활 이후 10배 이상의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성을 배웠습니다. 급한 성격 탓에 욕설부터 튀어나오지만 상대적으로 느긋한 인도네시아 국민성에 비하면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10억6천만루피아(1억2천만원)의 재산을 모은 쑨코노씨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한다.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가는 과정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보고 배운 점들이 자신의 시각을 달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별다른 재산없이 부모님 집에 얹혀 살 던 쑨코노씨에게는 한국생활을 통해 ‘코리안 드림’을 이룬 셈이다.

절제된 한국생활, 윤택한 삶 기반돼

소파 댕그남(태국, 46세)

초등학교 졸업 후 약간의 농사일과 건축 일용직에 나선 소파 댕그남씨. 월 3천바트(9만원)의 수입으로 어렵게 생활한 그는 96년 한국행을 택했다.
대구에 있는 중앙산업에서 2년간 산업연수생으로 일한 그는 1천5백만원(50만바트)의 목돈을 모았다.
98년4월 귀국 후 마을에 정미소가 없는 점에 착안한 그는 7만바트(2백만원)를 투자, 정미기를 구입하고 정미소에서 나온 부산물을 활용하기 위해 돼지 농장도 시작했다.
태국 대졸 사무직 근로자의 평균 연봉인 8만바트의 2배 이상 수입을 올리고 있는 그는 한국에서의 고생이 미래를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정미소 운영과 돼지 사육으로 돈을 번 소파 댕그남씨는 2001년 40만 바트를 투자해 태국 전통가옥을 새로 신축했고 자동차를 구입하기도 했다.
허름한 집과 약간의 논을 가지고 있던 그는 과거에 비해 9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회사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다른 도시에 거주하는 친구들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고생한 만큼 고국에 있는 가족들은 윤택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공적인 연수를 마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절제된 생활을 꼽은 소파 댕그남씨는 한국인과 똑같은 생활에 빠져들 경우 연수생활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밝힌다.
태국인들은 대부분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고 밝히는 그는 한국 사람들이 다혈질이라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빨리빨리 다그치는 모습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는 8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이 30년 정도는 더 발전한 것 같다고 밝힌다.
같은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남들보다 몇 배 더 발전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한국인 고용주가 고용하지 않으면 사업장을 이탈해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습니다.”
최근 심각한 불법체류자 문제에 대해 진심어린 충고를 던진 그는 회사생활에 충실한 연수생만이 값진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서 목돈 마련 제빵회사 CEO변신

사파라리에브 자혼기르(우즈베키스탄, 30세)

“사장님이 우즈벡 귀국 후 사업하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검토한 사업이 주유소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연수생 출신 자혼기르씨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빵 공장 2개를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다. 2개의 빵 공장에서는 2교대로 20명의 종업원들이 바쁜 손놀림을 하고 있으며 잡화가게 1개를 인수해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자혼기르씨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연간 1,800만슘(1천8백만원). 이 같은 액수는 한국행을 택하기 전의 15배로 우즈베키스탄 평균 임금의 30배 수준에 달하는 큰 금액이다.
대학 졸업 후 도로관리업체에서 월 10만슘(10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은 셀러리맨 자혼기르씨는 지난 97년 8월 한국행을 선택, 경기도 안양 소재 대유단조에서 1년8개월간 연수생으로 일했다. 1천2백만원 정도의 목돈을 모은 자혼기르씨는 99년 4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고 지난 2000년, 4천달러 가량을 투자해 빵 공장을 세웠다.
“귀국 후 6개월간 사업구상 및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주유소 할 생각도 해봤지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주식인 빵을 생산, 판매할 경우 사업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번 돈으로 공장을 2개로 늘린 자혼기르씨는 한국 사람들만의 근면과 성실, 그리고 친절함에 큰 자극을 받았다.
연수생활 초기엔 의사소통이 잘 안되고 매운 음식 적응에 힘들었지만 손짓 발짓을 동원한 자혼기르씨는 어렵고 힘든 프레스 작업을 척척 소화할 정도로 빠른 적응능력을 보였다.
연수업체를 이탈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자혼기르씨는 브로커 농간에 휘말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진설명 : 기협중앙회는 지난 17일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산업연수생 출신 성공인사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수여식에 앞서 연수생들이 김용구 기협중앙회장의 축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사진=나영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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