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성큼 다가섰다. 뜨거운 햇살은 살이 익을 정도여서 여린 피부를 다치게 한다. 이럴 때일수록 숲 속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국내 수많은 계곡들. 울창한 숲 속을 가르며 흘러내리는 옥수(玉水)들. 비슷비슷한 풍광 속에는 여름 더위를 피할 사람들을 기다리는 듯 우렁찬 물소리로 유혹하고 있다. 국내 몇 안 되는 오지 마을 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곳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설피마을 인근이다. 오지마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도심의 인파가 찾아들면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떠나는 지금이 처음이라면 여전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원시림이 새악시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강선리-곰배령을 잇는 봄철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얼레지꽃이 온 산하를 보랏빛으로 물들일 때의 모습은 감동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곰배령은 울창한 산림에 펼쳐진 야생화와 산나물로 인해 “천상의 화원”이라 칭해지는 곳. 생각만 하던 중 2~3년을 훌쩍 보내고 2005년 여름초입에 곰배령을 찾았다. 이번 여행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출판사 사장과 그의 대학 동기 한명. 동창 한 명이 내린천 근처의 고사리라는 마을 산 속에 “큰곰자리”라는 펜션(016-335-2342)을 만들었는데 염치불구하고 집들이에 끼어들어 하늘과 맞닿을 듯한 고지대에서 밤새는 줄 모르고 술을 마시는 황홀한 밤을 보냈다. 먼저 계산된 것이었지만 전날 마신 술독을 빼내려면 트레킹을 해야 한다고 그들을 유혹했다.

하늘공원의 하룻밤
엄나무 밑에서 나오는 방동약수에서 술독을 풀고 천천히 설피마을로 찾아 들어간다. 진동리에서 설피마을 가는 길은 어느새 포장이 되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길은 포장이 되면서 수월해졌지만 오지라는 느낌은 조금씩 벗어던지고 있다. 설피마을 가는 길은 비포장 길.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강선마을 들어가는 초입부터 차량 출입통제를 하고 있다. 차량 뿐 아니라 사람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점봉산이 자연휴식년제 기간이라서 입산할 수 없다는 것. 이럴 때는 재치를 발휘하는 순발력을 가져야 한다. 강선마을에서 하룻밤 거했던 서래암(성일스님)의 이름을 팔았다. “거기 가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산에 오르는 일은 할 수 없다. 산에 올랐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엄포를 받으며 천천히 강선마을로 발길을 돌린다.
차단기가 굳게 내려진 산길은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울창한 숲과 강선 계곡이 따라 붙어 시원하다. 그냥 걷지 않았다. 숲에 피어난 앵초, 괭이눈, 벌개덩굴, 모데미풀 등을 비롯하여 산나물 등을 꼼꼼히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1km 남짓 걸었을까? 마을 인가가 나서기 시작한다. 조금은 변한 모습이다. 처음 만나는 민가는 건물을 새로 지었는지 형태가 번듯해졌고 나물 삶던 아궁지도 숲속에 가려져 있다. 첫 집 마루에 앉아 있는 노부부에게 잠시 시선이 멈춘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발톱을 깎아 주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외지인들이 들어와 방해한다는 생각을 할까봐 입가에 살짝 미소만 짓고 가슴속에 담는다.

만행의 즐거움
첫날 왔던 때를 떠 올리면서 암자 근처에 이르니 라면, 차를 파는 ‘산에(그날 간판이 따로 없었다)’ 집이 나선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니 산길 오르려면 미리 뱃속을 채워야 할 듯. 건물은 보잘 것 없었지만, 물맛이 좋아서인지 라면 맛도 좋고 막 무친 듯한 참기름 향 진한 상추겉절이가 괜찮다. 그들에게 정보를 얻어 듣는다. 원래 이 집은 서래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이 살던 집이란다.
그 스님은 일산 쪽으로 갔고 인연돼서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젊은 부부. 썰매개가 마당에 여럿 누워 더위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대충 정보를 얻어 듣고 곰배령 산길을 따라 오른다.
울창한 숲, 무성히 자란 야생초, 경사도 낮은 산길, 맑은 계곡물 소리. 아주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면서 한발 한발 힘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얼레지꽃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고 씨만 간신히 발견할 수 있다. 대신 벌개덩굴과 습지대에 사는 고비, 속새는 지천이다. 중간 즈음엔 아름다운 폭포가 있어 한참이나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서도 곰배령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강선마을에서 2.5km 정도 될 것으로 예상된다. 능선에 이르러야 곰취, 참나물이 있다는 것으로 유혹하면서. 막바지에 달한 즈음에는 약간의 숨 가쁨이 느껴진다. 일행을 먼저 앞세우고 잠시 넓은 초원(해발 1,100m)속의 풀밭으로 들어간다. 수천 평에 걸친 광활한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어서 키 큰 식물도 없다. 모두 발목까지 오는 풀이다. 손쉽게 찾을 수 없는 곰취, 참취, 전우치 등이 풀숲에 숨어 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연한 순들. 그래서 이곳을 산나물 천국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일절 들어갈 수는 없도록 차단해 두었다.

우리 식물의 보고
점봉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시림에 가까운 곳으로 꼽히고 있다. 식물의 남북방 서식지의 한계선이 맞닿아 우리나라 식물 종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824종의 꽃과 나무들이 모여 자생하는 곳으로 보고되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지역. 나물들에게 눈도장만 찍을 수밖에. 아쉬운 마음 간절하지만 사진만 찍고 능선 길에 오르니 여전히 장승이 반긴다.
점봉산은 자연휴식년제여서 산행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곰배령 바로 옆으로는 작은 점봉산(1,295m)과 호랑이코빼기(1,219m)가, 멀리는 설악산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가칠봉((1,240m)이 솟아 있다.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했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많았다.
다소 지친 발을 이끌고 하산 길에 서래암에 들른다. 오래 전 만났던 스님의 눈빛은 많이 달라져 있다. 마침 옹심이 미역국으로 저녁 공양을 하는 스님과 마주 앉았다. “많이 달라져 보입니다” 했더니 “그동안은 속가인이나 다름없었고 지금은 스님이 되어서 그런가보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스님에게서의 옛 느낌은 찾을 수가 없다. ‘삶은 이렇게 처한 위치에 따라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구나’를 생각하면서 교훈 하나 가슴에 담고 내려왔다. “성불하세요. 스님”

■대중교통 : 상봉터미널에서 현리행 버스를 이용. 대중교통은 이용이 불편하고 곰배령을 향하는 여행사가 많다. 당일코스로 충분하다.
■자가운전 : 양평-홍천-철정-451번 지방도-고석평-31번 국도-상남-방대교를 지난다. 방대교에서 설피마을까지는 26km. 방대교를 건너 우회전, 21km 남짓 달리면 쇠나드리(바람불이)교에 이른다. 쇠나드리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설피밭으로 이어진다.
■별미집과 숙박 : 주변에 메밀막국수, 순두부, 토종닭 등을 파는 강원도 토속음식점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방대교에서 2km 정도에 있는 고향집(033-461-7391)은 허름한 건물이지만 오래 전부터 소문난 두부집. 직접 쑨 두부와 채마밭에서 키운 야채를 이용한 반찬들. 모두 들기름을 이용해 식당 안은 구수한 냄새가 배어 있다. 또 진동계곡 가는 길에 있는 두무대송어횟집(033-461-6700)이나 진동리 산채가가 있다. 숙박은 방태산 자연휴양림(033-463-8590)이나 세쌍둥이네 풀꽃세상(033-463-2321), 설피산장(033-463-8153) 등이 있다.
■참고 : 곰배령을 보려면 근처 민박집을 이용해 인제 현리에 있는 인제 국유림관리사무소(033-463-8166)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신고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 수도 있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