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삶이 정지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그런 때만이 아니다. 이럴 때는 나 자신이 잡고 있는 ‘끈’을 잠시 놓고 싶어진다. 애써 보려고도, 찍으려고도 않는다. 그저 내 마음과 몸이 함께 따라 움직이는 데로 자동차를 운전하면 되는 일이다. 문득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생각난다. 영화 속 세대가 같아서일까? 세 번을 연거푸 보면서 막장으로 치닫는 밴드 하류 인생(?)을 보면서 왜 그렇게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을까? 영화 속에는 아주 오랜 시절, 내가 놀던 그때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요새처럼 소소한 것에까지 가슴이 울컥하고 무너져 내린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이 그리운 탓일 게다.

삶에 물음표(?) 하나를 찍고 내내 일상의 반복을 행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먹고사는 일이 시키는 데로 내 머리와 마음은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 충주 가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으레 한 달에 한 번씩 가야 하는 충주. 일을 마치고 나면 오후 2시가 훌쩍 넘긴다. 벌써 1년여 동안 행해진 일이니 색다를 것도 없다.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이니 또 색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는 일상의 목적을 핑계 삼는다. 월악 나루터 근처 도로변에 잠시 차를 세운다. 단양에서 마늘을 사왔다는 노부부는 그늘진 곳에 앉아 마늘 대를 가위로 잘라내고 있다. 그들을 통해 “단양에서 마늘 축제를 하는구나”하는 정보 하나를 얻는다. 넓은 충주호반으로 배 한 척이 들어온다. 배 안에 많은 사람이 타고 있는 모습이 아스라이 눈 속에 잡힌다. 관광차가 있는 것으로 짐작건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놀이를 나온 것일 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편한 시기는 나이가 들어서야 가능한 것일까?
나루터를 벗어나 1.5km만 달리면 월악산 송계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아름다운 송계계곡에 신록 우거진 지금 어떤 모습일까? 딱히 보지 않아도 될 그곳이 계절이 다르다는 이유로 궁금해진다. 길목에 양파를 파는 가판대가 많이 눈에 띈다. 이곳이 양파 특산지였던가? 양파 하면 무안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차를 멈추고 양파 담기에 바쁜 촌부에게 말을 건넨다. “제천 송계리 양파가 최고로 좋아요. 축제도 끝났는데요. 멀” 이 지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사투리 억양 속에는 계산되지 않은 순박함이 함께 묻어난다. 가격도 의외로 싸다. 혼자 몇 달은 너끈히 먹고도 남을 만한 양파 한 자루를 사니 가슴 뿌듯해진다.
다시 계곡 길을 따라가면서 텐트를 치는 대학생 야영객들을 만나고,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는 사람들을 대면한다. 월악산(1,094m)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송계계곡. 멀리 안개에 휩싸인 월악영봉에서는 알지 못하는 강한 기운이 세어 나오는 듯하다. 계곡 내에는 월악영봉을 비롯해 자연대, 월광폭포, 학소대, 망폭대, 수경대, 와룡대, 팔랑소 등 송계 8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곳은 두어 곳뿐. 송계계곡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 망폭대에 잠시 발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이곳은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그 앞에 덕주사 남문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던 곳이라는 와룡대가 있다. 또 하나의 명소 팔랑소는 신라 시대 여덟 공주가 내려와 목욕을 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곳은 유원지 음식점이 있다. 2백여 평의 넓은 암반과 폭포로 이루어져 비경을 자랑한다. 덕주사 입구를 그냥 지나치면서 닷돈재 야영장에 잠시 멈췄다. 닷돈재라는 명칭은 왜 칭해졌을까? 옛날 문경과 한수 청풍나루까지의 중간지점이 바로 이곳이어서 이곳부터 짐 값이 닷 돈이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산적들이 통행료로 닷 돈씩 갈취했다고 해 닷돈재라고도 한단다. 그러면 이곳부터 제천시에서 충주로 지역이 바뀌는 것일까? 시원하게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이내 미륵사지도 지나쳤다.
그리고 미리 만나기로 했던 수안보 파크텔(043-846-2331, 02-2253-4411(서울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홍보직원을 만났다. 그가 오래전부터 자랑하는 음식점이 ‘산 밑에 집’(043-845-5107)이다. 집은 도로변에서도 약간 들어간 데가 간판도 작아서 초행자는 찾기가 쉽지 않을 그런 위치다. 새로 지어낸 식당 건물 주변으로는 채마밭을 일구고 직접 오리 등 가축을 키우고 있다. 농사를 짓기 때문에 가끔 예약 전화를 놓친다는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10년의 세월이 훌쩍 넘겼지만 아는 사람들만 찾아든단다. 검은빛이 나는 오리육질, 국물도 엄나무 등 약재를 많이 넣어서 색깔이 짙어졌다. 약재를 건져내서인지 국물 위에 파만 송송 떠다니고 헐벗은 오리 한 마리 덩그러니 들어간 모습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은데, 반찬은 나름대로 정성스럽다. 국물은 담백하고 시원했으며 육질은 부드럽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중년 분들의 건강식으로 좋을 듯하다. 다른 곳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고 입에 침에 바르며 말하는 홍보직원. 그 진가는 몇 사발의 국물을 먹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또 윤기 좔좔 흐르는 찰 쌀에 밤, 썬 대추 넣어 만든 밥을 국물에 말아먹는 맛도 괜찮다. 머지않아 채마밭에서는 ‘대학찰옥수수’가 익어갈 것이다. 독자들에게는 3만 원(원래는 3만5천 원) 가격으로 해주기로 약속받았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잠시 수안보에 발길을 내딛는다. 수안보는 옛 명성을 잃어버리고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동석했던 몇 사람의 대화 속에도 그런 애환이 느껴진다. 하여튼 원래 계획은 온천욕이 목적이었지만 여행의 묘미는 예정되지 않은 일에 묘미가 있는 것. 그들을 따라간 곳이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떠오르는 시골 나이트클럽(043-846-5001). 일렬로 놓여 있는 무수한 의자. 이른 시간이라 찾아온 손님은 하나도 없이 텅 비어 있다. 문득 영화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시간이 지나면 영화 속처럼 잊힌 밴드들이 찾아와 노래를 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행지에서 생긴 색다름에 기분이 좋아진다.
정작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에 밖으로 나왔기에 반주하는 밴드도, 춤을 추는 사람들도 만날 수 없었지만, 그날 좋아하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멋진 영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감상한 것처럼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아름다운 여행지보다는 시골 허름한 다방에서 아가씨들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1천5백 원 하는 싸서 좋은 차 한 잔 마셔보고도 싶고, 기회가 되면 시골 나이트클럽에 가보고 싶은 생각,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필경 나 혼자 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자가 운전 = 영동고속도로-여주 분기점-충주 나들목(괴산을 이용해도 된다)-수안보 문경 쪽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월악나루터, 수산 팻말이 있다. 월악 나루터 지나서 얼마 가지 않으면 우측에 송계계곡 가는 길목이 나선다. 계곡을 따라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왼편으로 가면 미륵사지, 우측으로 가면 수안보 쪽인데, 수안보 4km 정도 앞두고 산 밑에 집이 있다. 수안보 파크텔은 온천 단지에서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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