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어느새 9월의 문턱을 두드리며 넘어섰다. 습한 대기 속을 헤집고 품어대는 풀벌레 소리, 익어가는 홍고추, 조금씩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들…. 계절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심스레 우리 곁을 지나치기도 하고 다가서기도 한다. 초가을 뙤약볕은 여름철보다 더 뜨겁지만 조석으로 불어대는 시원한 바람은 가슴속 열기를 조금씩 식혀준다. 풀벌레 소리 따라 떠나는 초가을의 여정, 그곳이 우리들을 손짓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뜬금없는 메일 한통을 받게 된다. 여주에 사는 필자를 위해서 보내온 해여림식물원(031-882-1700, www.yearimland.com)에 대한 내용이었다. 무심결에 읽어낸 기사에는 예림당이라는 아동물 출판사를 경영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내려와 식물원을 일궈낸 사람에 관련된 인터뷰 기사였다.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기사를 읽지도 않았고 자료를 따로 받아놓지도 않았다. 이후 한국관광공사의 이달의 가볼만한 곳 후반기 선정회의에 참여했는데 해여림식물원이 추천지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식물원에 대한 호기심이 솟아나면서 축축한 날씨를 가르고 여주군 산북면 상품리 흙석이골(방축골)로 찾아 나선다. 전화번호도, 위치도 모른 채 무작정 산북면으로 향해 들어가는데 예상과는 달리 딱히 팻말도 눈에 띄질 않는다. 산북면은 위치적으로는 양평군과 광주군 경계지점으로 고산이 많아서 여주에서도 첩첩한 산골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결국 산북면사무소에 들러 위치를 알아내고 식물원을 향해 달려가니 먼발치로 보아도 거대한 식물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에서는 꽃은 보이지 않고 야산을 가꾸고 일궈 놓은 듯 식물이 들어차 있다.
입구는 월요일(휴관)이라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렵사리 통화를 하고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식물원을 돌아보게 된다. 해여림 식물원은 “온 종일 해가 뜨는 여주의 숲”이라는 의미를 담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동쪽을 갸우뚱 바라보고 있는 넓은 위치가 아마도 햇살 받기에 적당한 듯 짐작된다.
식물원 전체 면적은 21만평, 관람면적 6만여 평의 식물원이 지난 5월 19일 문을 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해여림식물원은 1973년에 도서출판 예림당을 설립하고 1991년에는 도서출판 능인을 설립해 30년 넘게 아동도서 전문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나춘호(63) 원장이 200억 원의 사재를 털어 지었다.
식물원은 관람 동선 거리만도 10km로 일일이 걷기에는 무리가 따를 정도로 넓다. 특히 뜨거운 땡볕이 부담스러운 여름철에는 더욱 힘들 듯 하지만 초가을 여행지로는 손색이 없다.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초본류 1,800여 종, 목본류 1,300여 종, 구근류 80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5개의 주제별 동산으로 구획을 정리했다. 눈에 띄는 연구동 건물 이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건물은 없고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 한 동은 눈엣 가시처럼 느껴진다.
식물원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 ‘꿈의 동산’은 낭만이 있는 공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천연지라는 연못을 만난다. 1,000여 평의 연못에 갓 피어난 형형색색 400여종의 수련이 탐스런 꽃을 피우고 있다. 마치 무안 회산 백련지의 축소시킨 듯 연못 안에 나무다리를 연결하고 있다. 천연지 뒤편에 조성된 여림정원에는 골든타임, 단풍제라늄, 빅토리오 라벤더 등 110여 가지의 허브가 심어져 있다.
‘희망의 동산’은 측백나무 아래 미로숲 일대를 일컫는다. 히어리, 댕강나무, 철쭉, 벌개미취 등이 군락을 이룬 달빛정원, 돌단풍, 잔디패랭이, 흰줄무늬사사 등 각종 식물과 암석이 조화를 이룬 암석원이 기다린다. 특히 보랏빛 벌개미취 꽃은 초가을 운치를 더해준다.
‘미래의 동산’은 식물원 관람의 백미 코스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은 비밀의 화원. 튤립과 히아신스가 4-5월 내내 화사한 자태를 뽐냈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앙증맞은 꽃들이 열 지어 땅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하늘 향해 쑥 올라간 나무 밑에는 쉬어가라는 벤치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 뛰어다니는 가족 한 팀이라도 만나면 아름다운 사진이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을에는 국화, 겨울에는 눈꽃을 감상할 수 있다. 화원 아래 아치 터널에는 으아리, 나팔꽃이 터널을 따라 덩굴을 이루고 있고, 향기가 백리를 간다는 분꽃나무는 군락을 만들었다. 나라꽃 정원에서는 태극 모양의 정원을 가득 메운 250여종의 무궁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
더 위로 올라가면 ‘행복의 동산’이다. 이곳은 웰빙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식물들의 경연장이다. 모시대, 노루발풀, 천궁, 지황, 만병초 등 약용 식물 1,000여종을 심어 놓은 동의보감 정원은 특히 약용식물에 관심이 많은 필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종모양을 한 금강초롱 닮은 모시대 꽃과 생전 처음 보는 지황의 분홍빛 아름다움에 절로 발길이 멈춰진다.
약초 동산에서 멀지 않은 “풍요의 정원”에는 먹을 수 있는 수박, 참외, 호박, 적오크(상추), 홍현채(식용 아마란스) 등 140여 가지의 채소를 한 데 모았다. 조금 더 산위로 오르면 ‘보람의 동산’이 있는데 는 장미원, 습지원, 아이리스원, 자연생태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렇게 한바퀴 빙 돌아보는데 3시간정도가 소요된다. 늦게 출발한 식물원이지만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여느 곳하고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 천천히 가족 손 붙잡고 식물원 감상하기에 손색이 없다. 앞으로 식물연구소, 눈썰매장, 열대식물원, 천체관측소, 민속박물관, 청소년교육원을 갖춘 ‘예림랜드’로 꾸밀 계획도 갖고 있다.
정작 나춘호 원장은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돌아오고 나서 통화는 할 수 있었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많은 말들이 통화 속 여운으로 느껴진다. 초가을, 가을꽃이 만발해 꽃 향에 취하는 날 다시 이곳에 발길을 내디뎌 볼 생각이다.
■대중 교통 : 서울 강변역 1113-1 좌석버스, 서울 잠실역 500-1 좌석버스, 서울 양재역 500-2 좌석버스(곤지암 방면)이용. 곤지암 시외터미널 시내버스, 직행버스(양평방면) 해여림식물원(상품리 하차)
■자가 운전 : 서울-제1중부고속도로-곤지암 IC-곤지암사거리-98도로 양평 방향-산북면 삼거리-해여림식물원/양평에서 양평대교-98도로 곤지암 방향-산북면사무소-해여림식물원
■여행포인트 : 해여림 식물원은 9월부터 본격적으로 일반인들의 관람을 유치할 생각이다. 지금은 도시락을 준비해가야 할 듯. 아니면 곤지암쪽에서 유명한 소머리 국밥으로 요기를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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