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잘살아보세’라는 영화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1970년대 초 한 농촌에 파견된 가족계획요원이 출산률을 줄이기 위해 주민들의 잠자리까지 관리한다는 코믹영화다.
당시는 일자리가 없고 농사지을 땅이 없는 상황에서도 ‘농사 중 최고는 자식 농사’라는 전통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었고, 광범위한 실업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에 정부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와 함께 산아제한정책을 국가사업으로 펼친다. 순박한 많은 국민들이 참여했다. 그리하면 지긋지긋한 가난의 멍에를 벗고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었기 때문이었다.

CEO의 비전제시 간절

이때 “다 함께 잘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도 같이 시작됐다. 그 무렵 우리 농촌은 비좁은 농토에 옹기종기 모여 가난에 찌들려 살고 있었다.
농가의 80%는 초가지붕이었고, 전기가 들어가는 집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식수는 마을의 몇 개 우물과 샘물에 의존했고, 도로는 좁고 비포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라이프’誌는 한국 농민들을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기어 다니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농촌에 근대화의 불길을 당긴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처음에는 정부가 주도했지만, 곧 농촌 스스로의 근면, 자조, 자립 운동으로 전개됐다. 그 뒤 도시, 학교, 직장, 공장으로 퍼져나가며 고도성장의 기틀을 다지는 한 동력이 됐다.
이와 같은 새마을운동은 80년대 중반 정치권력의 개입으로 의미가 왜곡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가난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던 의식을 청산하는 계기를 만들었음은 틀림없다.
필자가 이 시점에서 독재정권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일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그 시절과 같은 사업을 다시 펴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금은 정부보다는 시장의 힘이 세고,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시장경쟁에 의해 잘살고 못사는 것이 결정되는 시대이다.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꿈을 가진 경제주체들의 각축장이 되게 해야 하고 역동성이 넘쳐 나는 곳이 되게 해야 한다.
30년전 정부는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고, 우리의 아버지와 형들은 그 꿈을 공유했으며, 부지런함과 희생으로 그 꿈을 실행에 옮겼다. 기업과 그들의 CEO들도 그랬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시장에 과감히 도전했다. 설계도면도 없이 선박을 수주하고, 황무지에 자동차공장을 세웠으며 전자산업을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꿈이 있었고, “하면 된다”는 신념이 있었으며, 이들의 도전을 받쳐주는 정부, 꿈을 함께 하는 근로자와 국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비전, 꿈, 도전, 열정은 우리를 세계 10위권 무역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1인당 GDP 등 여타 경제지표로 볼 때 우리는 선진국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 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질 좋은 성장이어야 한다.

꿈과 신념을 갖자

그러나 한국경제號는 지금 흔들리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두고 투자를 하지 않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부진이 지속되고 있다. 시장이 활력을 잃고 있으며, 경제주체들의 경제하려는 의지가 약화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경제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후손에게 가난의 멍에를 다시 물려 준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도약의 나래를 펴야 한다. 이은상의 시 “고지가 바로 저긴데”에서처럼 “예서 말 수는 없는 것이다.” 기업들의 의욕을 살려 다시 성장의 불을 지피고 일자리를 창출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시장과 기업을 중시하는 정책의 비전과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모든 경제주체들이 “더 잘살아 보세”라는 꿈과 신념을 공유하며 함께 그 고지를 향해 나가게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국가나 기업의 성패는 CEO가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꿈을 심어주고, 그들의 역량을 어떻게 결집시켜 나갔느냐에 의해 좌우됐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홍순영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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