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는 절대 사양산업이 아닙니다. 기술개발을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 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석정달 (주)명진섬유 대표이사는 7~80년대 수출을 통해 우리나라 산업화 토대 구축에 기여한 섬유산업이 최근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며 존립자체 마저 위태로운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려서부터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과 소질이 남달랐던 석 대표는 결혼 후에도 집에서 사용하는 커튼, 침대보, 이불 등은 직접 만들어 사용했음은 물론 주변으로부터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소품들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알음알음 주변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던 취미를 살려 아예 사업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석 대표는 원단판매유통업으로 1976년 창업했다. 석 대표의 뛰어난 디자인 솜씨와 최고 품질의 원단으로 회사는 창업 후 곧바로 전국 5대 도시에 대리점을 둘 정도로 번창했다.
원단판매유통만으로는 원하는 색상과 원단을 공급받지 못할 석 대표는 원단을 직접 생산키로 마음먹고 1982년 중고기계와 종업원 36명으로 공장을 임대해 나염·염색공장인 명진섬유공업사를 설립했다. 석 대표는 남다른 사업수완으로 1년 뒤 종업원 150명에 자체 공장을 가진 회사로 키워냈다.
하지만 회사가 항상 좋은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 중반 수익이 된다 싶어 업체들의 진입이 많아져 치열한 경쟁으로 수익률이 급감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직에 몸담고 있던 남편이 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됐다.
“그렇게 사업을 반대하던 남편을 여의고 나니 모던 것이 내 책임인 것 같았다”며 석 대표는 당시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석 대표는 실의에만 빠져있지 않았다. 남편 목숨과 바꾼 회사라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의 회사를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회사경영에 더욱 매진했다. 경쟁에서 살기 위해서는 기술개발 뿐이라는 믿음으로 직원교육과 기술개발에 적극 투자한 결과, 결국 3년 만에 회사를 다시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이후 거듭된 성장으로 회사는 직원이 330명으로 늘어나고 사이진공정을 완비한 명진산업, 수출을 담당하는 (주)명진코프를 잇달아 설립하며 섬유제품의 완벽한 생산공정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명진섬유가 또다시 위기를 맞은 것은 지난 1995년 제직공장을 설립하자마자 찾아온 IMF경제위기 때문이었다.
“환율 780원 수준에서 리스자금을 28억원을 차입했는데 경제위기를 맞아 환율이 급등하면서 이자상환에만 105억원이 소요됐다”며 석 대표는 그 당시 기업운영의 고충을 토로했다.
섬유 한 길만을 바라보며 기술개발에 매진하며 두 번째 경영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한 명진섬유는 현재 터키, 홍콩, 미국 등 6개국에 수출하며 한 해 200억달러 외화를 벌어들이는 우리경제의 숨은 일꾼이다.
“남편의 반대와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대구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하는 석 대표는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항상 자신있고 당당하게 처신해 온 것이 지난 30여년간 사업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최근 서비스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지만 섬유산업은 90% 이상이 수출로 외화를 획득하고 있고 산업의 특성상 고용창출효과가 크기 때문에 우리경제의 영원한 성장동력이라고 믿는다는 석 대표의 말 속에서 40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팔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나 역시 취미를 살려 기업을 했듯이 자신의 취미와 소질을 살려 뜻을 가지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 수 있다”며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적극 권장했다.
석 대표는 2004년부터 한국여성경제인 대구경북지회 제4대 회장직을 맡아 여성경제인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그 외에도 대구지방법원 산업조정부위원장 및 대구상공회의소 상임위원 직으로 수행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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