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楚의 영왕(靈王)이 허리가는 후궁을 좋아하니 허리가 가늘어지고 싶어 아사(餓死)하는 궁녀가 많았다는 고사가 있다. 현대여성도 뚱보는 싫어해 마르고 여윈 광고가 거리에 넘쳐난다.
중국에는 ‘後宮三千’이라는 말이 있는데 후궁이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얼마나 있었겠는가.
<秘記>의 기록에 의하면 주(周)왕조시대의 제도에서는 후(后)一인, 夫人三人, 빈(嬪)九人, 세부(世婦) 二十七人, 어처(御妻) 八十一人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이고 실제로 이것을 제도화 한것은 당조(唐朝)이며 <新唐書>의 기록에 따르면 황후(皇后) 아래 귀비(貴妃)를 필두로 이하 四妃를 부인(夫人)으로 하고, 소의(昭儀)를 필두로 이하 九人을 두고 빈(嬪)으로 하고, 첩호(捷好), 美人, 才人을 각각 九人으로 二十七人을 둬 세부(世婦)로 하고, 보림(寶林), 어녀(御女), 채녀(采女)의 합계 八十一人을 둬 어처(御妻)로 해, 총계 百二十二人을 뒀다.
전·후한(前後漢)때도 후궁제도가 있었고 특히 후한말기 환제(桓帝)는 궁녀 수천명을 궁전에 넣었다가 신하들의 간언(諫言)에 못견뎌 궁녀 500여인을 궁전에서 퇴출했으니 후궁제도가 엉터리임을 알 수가 있다.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왕조(西晋王朝)를 세운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은 정치에 싫증을 느껴 273년에 중류이상 문무관 집의 처녀를, 이듬해에는 하급문무관과 선비집의 처녀 5천명을 궁전에 끌어놓고 거기다가 281년에는 멸망한 오(吳)나라 궁녀 5천명을 선발해 낙양(洛陽)의 궁전에 넣어 만명 이상의 후궁들은 무제가 탄 양차(羊車)가 자신의 방 앞에 서도록 양이 좋아하는 대나무 잎을 꽂아놓고 소금물을 뿌리며 경쟁을 했다고 한다.
다음 수(隋)의 양제(煬帝)는 후궁이 최저 六千人. 당조(唐朝)의 백낙천(白樂千) 시인은 ‘장한가(長恨歌)’에서 현종(玄宗)의 ‘후궁가녀(佳女) 三千人’이라 읊었으나 일설에 의하면 장안궁(長安宮)과 낙양궁(洛陽宮)을 합치면 후비(后妃)四万人이라 제비뽑기로 하루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현종은 다른 후궁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양귀비(楊貴妃) 한 여자만 총애했으니 최고의 사치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에서도 초기의 강희제(康熙帝)는 규정에 의해서 皇后一人, 황귀비(皇貴妃)一人, 귀비(貴妃)二人, 비(妃)四人, 빈(嬪)六人 외에 귀인(貴人), 상재(常在), 답응(答應) 등 처첩(妻妾)을 정원없이 뒀다.
거명하지 않는 왕조에서도 수천명의 후궁을 뒀으며, 황제가 죽으면 배장(陪葬)하는 후궁도 있었다.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생존경쟁이 없는 곳이 없었으나 후궁사회는 여인집단 생활체제에 남자구실을 못한 환관(宦官)집단과의 공동체제였기에 그 생존경쟁도 다른 집단에 없는 특이하고 희귀한 생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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