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젊은 시절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 뒤늦게 성공하는 늦깎이가 많다. 그들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보면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다.
가장 위대한 조각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조각가 오퀴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은 쉰 살이 다 되어서였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한 그는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해서 조각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3번이나 낙방하는 바람에 석공노릇을 하면서 조각을 배웠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부업을 하면서 야간에만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로댕은 살롱에 작품을 출품 했지만 번번이 낙선했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던 것이다.
로댕은 석공으로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는 마흔 살이 다 되어 ‘청동시대’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 작품이 너무도 박진감이 넘치고 산 사람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된 탓에,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근거 없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작품이 너무도 빼어나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의심을 산 것이다.
“이 작품은 산 사람의 몸에서 바로 본을 떠서 만든 것임에 틀림없소. 이건 작품이 아니라 사기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그의 작품은 심사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일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한 신문과 잡지를 비롯해 일반인들까지 합세해 로댕을 사기꾼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나선 것이다. 로댕은 비참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로댕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기 일에만 매달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비록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인정받는 날이 오겠지. 느리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라네.”
결국 로댕의 결백과 예술성은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밝혀졌다. 다시 살롱에 출품한 ‘청동시대’를 보고 한 심사위원이 말했다.
“비록 사기일지는 모르지만, 그 사기 솜씨가 실로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는 다른 심사위원들을 설득해서 로댕의 작품을 3등으로 입선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의 오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로댕이 여러 걸작을 세상에 선보일 때마다 그의 작품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온갖 악평들이 쏟아졌다.
보통 예술가라면 자신을 사기꾼으로 몰아대는 그런 엄청난 비난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댕은 집요한 악평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 일에 대한 노력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 나갔고, 끝까지, 단호하게 싸워 위대한 예술혼을 증명해 보였다. 그의 태도는 의연한 것이었지만 목숨을 건 자제력이었다. 그의 태도는 극히 예민한 성격의 예술가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넓은 도량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예술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인내를 가지고 그 목표에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댕의 예술에 대한 의연한 태도는 예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말년에 이르러 로댕은 비로소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평가 받기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이 로댕에게, “당신은 천재야”라는 말을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았다. “천재라고? 그런 것은 없어. 오직 공부가 있는 뿐이야” 로댕이야 말로 가장 성숙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생명을 뛰어넘어 영원히 계속되는 웅대한 예술혼을 인류에게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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