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죽어서도 당신을 지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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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죽어서도 당신을 지킬래요”
  • 중소기업뉴스
  • 호수 1755
  • 승인 200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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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고 북지리의 봉황산 중턱에 세운 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알려지기 전까지)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있는 곳이다. 절집 대웅전 왼편에는 떠 있는 돌이 있다. 돌이 떠 있어서 ‘부석’이라는 절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이 바위는 의상을 사랑하던 선묘아씨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중국 여인 선묘가 어떻게 머나먼 이곳 경북 영주 땅까지 왔을까?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와 선묘아씨의 사랑을 알려면 원효대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의상대사는 서기 625년 당시 귀족 가정에 태어난 진골 출신이었다. 서울 황복사에서 20살에 삭발하고 승려로 입문해 입산수도 중에 원효를 만났다. 의상이 26살 때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섰다. 의상과 원효는 당나라를 거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까지 가려고 했지만압록강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돼 고생하다가 결국 귀국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으로 가게 된다. 그때 우리가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운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때다. 해골 물을 마신 원효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포기하고 속가로 나왔고 의상은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게 된다. 의상은 양주에 이르러서 신병을 얻게 됐다.
당시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 유숙하면서 몇 달 동안 병을 치료하게 됐는데 그 집에 선묘라는 딸이 있었던 것이다. 선묘는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라는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 가슴 앓듯, 그저 바라만 보면서 사랑을 키워 나가 사랑 고백을 해보지만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의상 나이 46세까지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대사의 제자가 돼 수학하다가 귀국하게 된다. 당나라가 30만 대군으로 이끌고 신라를 침범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것이다. 의상은 귀국길에 잠시 선묘의 집에 들르긴 했지만 만나지 못한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선묘아씨는 법의를 들고 한걸음에 달려 산동성 부두로 나갔지만 이미 조사가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법의를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했는데 때마침 해풍이 크게 일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 가게 된다. 이를 보고 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하면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이후 죽어 용이 돼 멀고 먼 귀국 길을 호위하였다. 의상은 문무왕께 당의 침략 흉계를 고했고 난을 무사히 면하게 됐고. 의상은 이곳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이르러 화엄종지를 만들게 된다.
당시 이곳에는 이교도들의 무리가 5백여명이나 있었는데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았는데 이때도 선묘아씨가 법력을 써서 지금의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3차례나 하였더니 무리들이 겁을 집어 먹고 모두 굴복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부석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부석사 선묘각에는 1400년간 이렇게 미소를 띄고 있는 선묘아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또 조사당에도 의상과 함께 있으며 의상이 지팡이 꽂았다는 선비화가 살고 있다. 이 절집에는 의상과 선묘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전화:054-633-3464 054-639-6498

■사진은 부석사 3층 석탑.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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