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공로는 군사 10만 명보다 높았다

고려 시대 말, 왜구의 침략으로 고려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왜구는 1375년부터 1388년까지 14년간 무려 378회나 고려의 해안을 침략해왔고, 수도인 개경의 치안까지 위협받게 됐다.
우왕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왜구는 침입 이래 가장 큰 규모인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2만 명이 쳐들어와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 연해를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이때 왜구를 물리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는 그 왜구를 물리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최영이나 이성계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운 사람이 있다. 바로 최무선(崔茂宣 ?∼1395)이다.
그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화약무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화약을 불꽃놀이에나 사용하는 것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던 최무선은 비범한 통찰력으로 화약은 불꽃놀이나 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서(經書)보다는 병서(兵書)를 즐겨 읽었으며 사물에 대한 여러 가지 궁리가 많았다.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무기를 만들기로 결심한 그는 화약 제조에 필요한 물품을 구해 실험에 몰두했다. 그런데 그는 첫 단계부터 실패를 거듭했다. 쉽게 유황과 목탄(버드나무 숯)을 구했으나 제일 중요한 염초(질산칼륨)를 만들 수 없었다.
당시 화약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던 나라는 원(元)나라 밖에 없었는데 그 제조법은 일급 국가기밀 사항으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았다. 최무선은 고려의 대외 무역항인 벽란도에 온 원나라 사람 이원(李元)이 염초장 출신임을 알고, 그를 찾아가서 끈질기게 눈물로 설득해 흙에서 염초를 추출하는 염초 제조법을 배웠다.
그는 수년 간의 실험을 거쳐 실전에 가능한 화약과 화약무기를 개발해냈다. 그는 “왜구를 막을 화약을 만들었다”고 당국에 알렸으나 무지몽매했던 조정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최무선은 전함을 설계하고 여기에 화약 무기를 장치하는 방법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져서 1371년 10월, 마침내 화통도감(火誌都監)이 설치됐다.
처음으로 화약을 원료로 하는 군사 무기를 만드는 기구를 둔 것이다. 최무선은 그때부터 본격적인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육화(六花)·석포(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誌)·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 등 18종의 화기를 제조하는 한편, 이를 실을 전함(戰艦)건조에도 힘썼다. 그리고 마침내 1380년 8월, 비장의 무기를 사용해서 적을 섬멸할 날이 다가왔다. 진포(鎭浦:금강 하구)에는 500여척이나 되는 왜구들의 함선이 도열해 있었다.
100척도 안 되는 고려의 전함들이 다가가자 배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왜구들은 조롱을 퍼부었다. 그 순간, 고려 전함에서 일제히 불을 뿜어댔다. 화포의 포탄이 쾅쾅거리며 날아가 왜선에 꽂혔고,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왜구들이 듣도 보도 못한 광경 앞에서 경악하는 사이에 왜구들의 배가 하나씩 차례로 불길에 휩싸여 500척의 왜선이 모조리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화약의 위력이었다. 이 전투는 고려 해군이 최대의 전과를 올린 대첩(大捷)이었다. 왜구는 화약 무기의 실체를 실감한 뒤로 노략질하러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동안 잠잠했다.
최무선의 공로는 군사 10만 명보다 높았다. 최무선은 또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을 저술, 아들 최해산에게 전해 조선 전기 화기 개발의 기초를 놓았고, 조일전쟁 당시 이순신의 무적 신화를 이루는 토대가 됐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