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궤열차를 아시는지? 작은 크기 때문에 ‘꼬마열차’라 불리며 근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인천과 수원을 오가던 서민들의 발이었다. 겨우 2량(二輛)으로 뒤뚱뒤뚱 철길을 달리던 꼬마열차(수인선)를 나도 딱 한 번 타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에 다닐 때였다. 갑갑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무작정 수원으로 가서 꼬마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1992년 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꼬마열차를 타게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방랑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협궤란 말 그대로 ‘좁은 궤도’라는 뜻으로 광궤에 대응되는 말이다. 즉 열차가 다니는 궤도(철길)에는 광궤와 협궤가 있는데 광궤는 두 줄의 레일 사이가 넓어 뛰어가야 다른 쪽 레일 위에 올라설 수 있다. 이에 비해 협궤의 레일은 뛰지 않고 평상 걸음으로도 한쪽 레일을 가볍게 딛을 수 있다. 협궤 철길은 여객실 폭 뿐만 아니라 레일 폭과 침목 폭이 좁아서 그야말로 꼬마열차가 다니기에 딱 알맞은 구조로 돼 있었던 것이다. 협궤열차가 얼마나 좁고 작았는지(선로 너비가 0.762m에 불과했다) 마차에 받혀 넘어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 식민지 시대인 1937년 8월 6일에 개통돼 인천 송도역과 수원 사이를 오가던 협궤열차(挾軌列車)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도로가 거미줄처럼 뚫리고 버스 등 다른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1995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협궤열차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서울과 부산을 2시간에 주파한다는 고속철도의 시대에 협궤열차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유산(현재 철도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배어 있는 곡진한 삶마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소금을 많이 싣고 다녀 ‘소금열차’로도 불렸던 수인선 협궤열차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객차 5~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 다니며 수많은 상인과 통학생들을 실어 날랐는데 원곡고개를 오를 때는 힘이 부쳐 승객들이 내려서 밀어야 겨우 넘어갈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특히 주말이면 나들이 나온 청춘남녀들과 망둥이 낚시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호황은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1973년에는 남인천역이 폐쇄되면서 인천의 송도까지만 운행됐고, 이마저도 부침을 거듭하다 1994년부터는 안산 한양대역까지만 운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년 뒤에는 모든 구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수인선 철길은 굽이가 많은 바닷가를 따라 깔려 있었다.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인천으로 가다 보면 왼쪽은 바다요 오른쪽은 비산비야의 들판이 내내 펼쳐졌다. 2량짜리 조그만 열차의 역은 대부분 역사가 텅텅 비어 있었고, 사무를 보는 사람도 없었다. 표도 열차 안에서 끊어야 했다.
“표 끊을 손님 없습니까?”
승무원은 좁은 통로를 오가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한쪽에서는 아이가 칭얼거리고 할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연신 들려왔다. 짐 보퉁이를 바리바리 싣고 장터로 향하는 아낙네들의 걸쭉한 입담도 들을 수 있었으며 협궤열차는 수원에서 출발해 어천, 야목, 사리, 일리, 고잔, 원곡, 군자, 달월, 소래, 남동, 송도역을 차례로 지나게 돼 있었는데 총 길이가 46.9킬로미터로 그리 길지는 않았다. 각 역을 지날 때마다 가지가지 사연을 안은 사람들이 서너 명씩 타고 내렸다.
수원역에서 표를 사 열차 개찰구로 들어가면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하는 안산의 한양대역까지 가는 협궤열차를 탈 수 있었다. 수원역을 출발해 흔들흔들 도심을 벗어나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역사도 제대로 없는 어천, 야목, 사리역을 지날 때면 갯가에서 잡은 조개나 바지락 같은 어물을 한 아름씩 들고 타는 아낙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주 앉은 사람의 무릎이 닿을 것만 같은 열차 통로에 어물을 담은 고무대야가 놓이면 통로는 꽉 차버리고 발을 뻗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달려 고잔역에 도착하면 뱀처럼 구부러진 전철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전철과 비교해 꼬마열차는 장난감 같았다.
고잔역에 내리면 소래포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린내 나는 갯가는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협궤열차가 다니는 철교,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교각 밑으로는 탁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갔다. 배 수십 척이 깃발을 펄럭이며 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구에서 파는 어물은 하나같이 싱싱했다. 마른 갈치나 멸치, 알이 굵은 피조개, 싱싱한 가오리, 각종 젓갈…. 상인들은 피곤한 몸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며 흥정을 벌였다. 새우잡이 소형 어선들이 새우를 가득 싣고 들어올 때는 포구가 떠나갈 듯 요란했다.
소래포구의 흥청거림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협궤열차는 사라졌지만 16년 전인 지난 1994년까지 철거덕 철거덕 쇳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철교는 그대로 남아 포구를 지키고 있다.
경기도 시흥시 월곶과 인천시 남동구 소래포구를 잇는 소래철교(길이 126.5m)는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세워졌다. 관광객들은 이 철교를 건너 소래포구로 간다. 좁은 다리 위에 올라서면 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며 철교 아래 갯골로 바닷물이 들고 나는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해질녘이면 멋진 노을도 가슴에 안긴다.
그런데 최근 이 철교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이다. 정밀 안전진단에서 교량 하부에 심한 부식이 발견됐고 주차 문제도 불거지는 등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구 상인들과 관광객들은 한 목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단지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옛 낭만이 서린 소래철교를 철거한다는 것은 근시안적 발상이며 생계와도 직결되는 만큼 보수를 해서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쪼록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하루 빨리 마련됐으면 한다.
하루에 세 번 씩, 증기를 내뿜으며 좁은 레일을 잘가닥 잘가닥 밟고 가던 협궤 열차는 그렇게 추억과 낭만의 모습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음 같아서는 수인선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고 소래철교도 보수를 거쳐 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한다.

■ 김 동 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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