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지켜 낸 시골 선비들

국보151호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500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군사, 법률, 산업, 교통, 통신, 풍속, 예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세밀하게 기록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25사, 일본의 ‘삼대실록’등의 수많은 사서를 제치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 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그것은 분량이 방대하고 보존이 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임금과 관리들의 잘못을 낱낱이 파헤쳐 역사로 남기려 했던 사관들이 의지가 담긴 사서로서의 진실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선왕조실록’은 두 사람의 시골 선비가 없었더라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조선왕조는 태종 시절부터 선대의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해, 세종 때부터 모두 4부를 만들어 4대 사고인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에 분산 보관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개의 사고 중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왜군이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다급한 소식이 들려오자 전라감사 이광은 ‘조선왕조실록’을 지켜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다. 이미 다른 사고들의 실록이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후였다.
그때 유생 안의(安義:1529~1596)와 손홍록(孫弘祿:1537~1610)이 실록을 안전하게 피신시킬 것을 자임하고 나섰다. 안의와 손홍록은 당대 호남지역 대학자였던 일재 이항에게서 동문수학한 제자들이었다. 그때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였다. 이들은 집안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왜군이 전주성에 쳐들어오면 ‘조선왕조실록’도 함께 불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관군은 왜군과 싸워야 하므로 우리가 실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하자.”
그러나 집안사람들은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왜군이 코앞까지 쳐들어왔는데 피난을 가야지요.”
“우리 조선의 수백 년 역사를 기록한 책이 불타 없어지게 되었는데, 너희는 달아날 궁리나 한단 말이냐?”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며 가솔 30여 명을 인솔하고 실록을 옮기는 작업에 나섰다. 그들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태조에서 명종에 이르는 13대의 실록 804권, 47상자와 고려사와 기타 서책 538권, 15상자 등 총 63상자였다. 수십 마리의 말과 인원이 동원되어 7일 동안 서책을 실어 날랐다. 피난처로 정한 은봉암은 내장산 깊은 절벽 위에 붙어있는 가파른 암자였다.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이어서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며칠 후 왜군이 가까운 곳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사람은 승려와 무사, 사당패의 도움을 받아 더 깊숙한 비래암으로 실록을 숨겼다.
그 후 383일 동안, 안의와 손홍록, 그리고 내장사 승려들은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실록을 지켰다. 만약 안의와 손홍록, 이 두 사람의 목숨을 건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까지의 조선 역사는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시골 선비 안의와 손홍록 덕분에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고,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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