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의 슈바이처

의사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37살에 가톨릭 사제가 되었고 23년동안 내전이 벌어지고 아프리카 수단으로 날아갔다.
“한국에도 어려운 벽지가 많은데 왜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나?”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운 홀어머니가 묻자 이태석(1962~2010) 신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에 나라도 가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가 도착한 수단은 내전으로 200만 명이상이 죽었고 전쟁 때문에 여기저기 지뢰가 깔려 있어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이 열병에 걸려 신음하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당에 물을 뿌려놓고 열이 내리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가 도착한 톤즈 마을은 남부 수단에서도 환경이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가 극성을 부리는 곳, 성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이 더 많은 곳, 물도 식량도 턱없이 부족한 곳, 그곳이 톤즈였다. 그곳 사람들은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염된 물을 마시며 잘 해야 하루에 수수죽 1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진료소라는 곳으로 가보니 흙과 대나무로 지은 세 칸짜리 움막이었는데 약품도 의료도구도 거의 없었다. 믿음의 용기로 그곳을 찾아 갔지만 막상 이 신부는 어디서부터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지 한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는 짐을 풀기가 무섭게 주변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리고 흙벽돌과 약간의 시멘트로 두 평 남짓한 그럴싸한 진료실 겸 처치실을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자선활동은 나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피고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짓고, 브라스밴드를 만드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속적으로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오지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동진료를 하며 8년의 시간을 보냈다. 소년병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상처 입은 아이들 손에 총 대신 악기를 쥐어주고 그들만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어서 음악으로 전쟁에 지친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병원을 지어주고, 학교를 지어주고 가르쳤으며, 현지어인 딩카어를 열심히 배웠고, 밤잠을 줄여가며 환자들을 돌봤다. 현지인들은 이 신부를 ‘쫄리 신부님’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그를 성자처럼 따랐다.
그런데 이 신부는 의료활동을 하던 중 2008년 10월, 2년마다 한번씩 들리는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받던 중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이 신부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도 “톤즈에서 우물 파다 왔어요, 마저 다 해야하는데...” 라면서 수단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의지가 워낙 강해서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리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는 투병 중에도 자선 공연도 하고 각 지역의 성당을 직접 찾아가서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했다. 결국 그는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2010년 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2010년 4월 11일, KBS 스페셜로 방영 된 ‘수단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와 이를 재편집해 2010년 9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는 4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았다. 그는 톤즈 사람들에게 쫄리 신부님이라고 불리는 다정한 친구였고, 의사였고, 선생님였고, 지휘자였고, 아버지였다. 톤즈마을 신자 1만여 명뿐 아니라 수많은 주민들이 ‘쫄리 신부’를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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